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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일

살아오면서 너무 아름다워서, 행복해서, 저절로 눈물이 나는 경험은 흔치 않을 거다. 내가 느낀바로는 궁극의 행복은 무탈하게 자라나는, 해맑은 웃음으로 뛰어 노는 자식을 보는 일이다. 이보다 더 큰 기쁨은 없다. 인생의 가장 큰 선택은 아기를 가진 일이다. 가장 잘한 결정이기도 하다. 물론 천방지축의 아이를 보는 감정은 다각적이다. 기쁨과 불안 염려 즐거움과 피로가 혼재한 상황에서 다이아몬드 엣지에 반짝 빛을 발하는 순간에 내 영혼은 베인다. 너무 아름다워서 모든 고뇌가 상실된다. 이런 순간이 지속되면 그것이 천국일 것이다. 태어난지 천 일을 맞은 아들을 생각하며 감개무량한 기분에 휩싸인다. 건강하게 자라고 있는 아들이 대견하다. 천 일 동안의 희노애락이 너무 식상한 표현이지만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친다. 아기가 건강하게 자라주어 다행히도 노여움과 슬픔은 거의 없었다. 아이와 함께 부모도 같이 성장하는데 오히려 육체적 피로와 함께 마음의 평정을 유지못할때가 많았다. 자책하고 반성하며 스스로를 귀감삼아 나아간다. 모든게 처음이니까 힘듦과 시행착오는 겪을 수 밖에.

열 달

한율이가 태어난지 열 달이 됐다. 간혹 그런 생각이 든다. 이건 꿈과도 같은 일 이구나. 우릴 닮은 아기가 매일 아침 아장아장 기어와 머리맡에서 일어나라고 손을 휘두른다. 피곤에 쩔어 무거운 몸을 일으키면서 웃음으로 인사를 건넨다. 한 번도 아프지 않은 아기에게 고마운 마음이 든다. 요즘 티브이엔에서 방송하는 선다방을 처음부터 보게 되었는데, 첫 방송은 시큰둥하게 또 짝짓기 프로그램이군 하며 무덤덤하게 보았다. 그러다 지난 주말 방영분을 보다가 빵 터지게 웃겼고 설렘이 전염되는 듯한 재미를 느꼈다. 동화작가인 여자와 웹툰작가인 남자의 만남은 방송이래도, 설레이게 순수했다. _ 여자 : 저는 예술가 부부가 꿈이에요 _ 남자 : 저도 예술가 인가요? _ 여자 : (웃으며) 그럼요! 당연하죠. _ 남자 : 저는 술, 도박, 여자 안 합니다. _ 여자 : 저도 남자 안 합니다. _ 남자 : (수줍게) 이제 하셔야죠. 자리가 마무리 될 무렵, 고민 상담 쪽지에 남자는 ” 감정표현이 너무 서툴러요” 라고 썻는데 잠시후 다시 꺼내 아랫줄에 “하지만 이젠 괜찮아요^^” 라고 추가했다. 뭔가 멀지 않은 과거가 까마득했다가 돌아온 느낌이었다. 그런 인생일대의 사건을 거치고 이런 아기를 얻었다는 마법은 참 경이롭다. 인연이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작용이 오늘날 인류를 지탱하게한 원동력이다. 출연자들의 성공과 실패에서 지나간 내가 보였다. …

누가 그랬나요

부모들이 아이를 키우면서 흔하게 내뱉는 말들이 아이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될까. 가장 빈도수가 많은 말로는 공히 ‘까꿍’ 과 ‘지지’ 일 것이다. 까꿍이야  반응을 유도하기 위한 반가움의 표시 이지만 지지란 말에는 어떤 위생에 대한 위험의 경고가 내포되어 있어 예나 지금이나 우리는 셀 수 없는 지지를 들으며 성장해 왔다. 지지의  하면 안돼. 다쳐. 를 통해 우리는 위험을 배제하고 안전을 추구하는 삶의 방식을 습득하게 되지만 그 부정의 말들이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번뇌의 장으로 몰아갔던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욕망을 조절 하는 훈련. 훈육이란 이름의 본능 제어는 인간의 성장에서 중요한 요인이라고 생각되지만, 여하튼 어른들이 무심코 하는 말들을 고찰해 볼 필요는 있다. 언어의 습관이 과연 정서에 영향을 줄까. 7개월째 접어든 아기가 신나게 뒤집고 기어다니는 와중에 무언가에 부딪혀 운다. 재빨리 아기를 안아 품으로 감싸 머리를 쓸며 “누가 그랬어. 우리 이쁜 아가 누가 그랬어.” 하며 달랜다. 부딪힌 애꿎은 놀이기구를 “뗏지, 우리아가 아프게 했네.” 탓하며, “누가 그랬어. 누가” 아기는 금새 울음을 멈춘다. 이것은 장모님이 우는 아기를 달래는 방식이다.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풍경이지만 저런 말들이 한국인의 좋지 않은 특성을 만들겠구나(만들었구나) 란 생각이 들었다. 내 탓이 아닌 남 탓. 책임전가의 정신은 그렇게 유아기 …

파파

요즈음 회기된 과거의 기억이 수시로 내 가슴을 침범한다. 전혀 의도적이거나 정신건강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다. 아기를 보다보면 문득 내 어릴적 기억이 수면위로 떠오른다. 잔잔했던 수면위에 해녀의 거친 숨비소리가 갑작스레 터지듯, 평온한 현재는 과거와의 대화로 이어진다. 특히나 나의 아빠, 아버지와의 많지 않은 일화가 선명하게 떠오른다. 나는 울고 있었다. 단지 도넛을 먹고 싶다는 땡깡부림에 아빠는 나를 달래며 버스 정류장 가는 길의 작은 빵집엘 데려갔다. 홍콩 뒷골목의 허름한 가게가 연상되는 이미지가 선명하다. 아마도 네살 다섯살 무렵의 나에겐 쇼윈도의 불빛들이 몽환적으로 보였다. 그것은 과거를 낭만적으로 인식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도넛은 퍽퍽했고 달았다. 나는 도넛을 먹고 싶은게 아니었다. 아빠의 사랑을 갈구하느라 참았던 서러움이 터진것이었고, 그 울음의 정체를 감추기 위해 도넛을 먹고 싶다고 둘러댔던 것이다. 크고 따듯한 아빠의 손을 잡고 걸어가면서 그제서야 마음이 가라앉았다. 단편적인 기억의 진실이 갑자기 떠오른 이유를 결론적 의구심으로 말하자면, 사랑을 주고 받는 행위 과정의 감정적 불일치를 자각했기 때문이다. 문득 아들에게 사랑의 표현을 쏫으며 나는 동시에 나와 아빠의 관계를 회상하게 되었다. 연년차였던 바로위 작은 누나는 어릴적 건강이 안 좋았기 때문에 아빠는 유독 작은누나를 이뻐했다, 작은누나를 안아주는 만큼 나는 곁에서 부러움과 기다림의 기대심에  사로잡혔다. 아마도 그러한 것들이 쌓여서 어린 …

지난 여름

지난 여름이 어떻게 갔는지 추억에 묻기도 전에 겨울이 닥쳤다. 출생후 100일이 어떻게 갔는지 지난 여름은 알고 있다. 바로 더위와의 전쟁. 수면 부족. 만성피로. 덕분에 망한 나라의 인플레이션 만큼 치솟던 체중은 기세가 꺽였다. 마이너스 3Kg. 하지만 운동 부족으로 뱃살은 늘어나고 몰골은 피폐해진다. 왜 어른들이 하루라도 젊을때 애 낳아서 기르라는지 알것도 같다. 힘에 부치기 때문이다. 노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시점에서의 육아란 정말 고되다. 그렇지만 심신의 힘듦 이상의 희열이 집안을 감돈다. 방그르르 웃는 아기의 모습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쁨이 가득하다. 곤히 자는 아기의 얼굴엔 평화로운 축복이 서렸다. 아기를 키우는 일은 삶의 희생이 아니라 축제였다. 오늘 168일째가 되는 아기를 돌보며 나는 우리 부모의 심정을 되새긴다. 나를 키우면서 이렇게 기쁘고 힘들었겠구나.

출생

건강한 아들이 태어났다. 지난 6월 17일 토요일 오후 4시 26분. 양호(태명)의 첫 울음소리를 들었을때 형용할수 없는 감정이 일었다. 그 감정을 쉬이 설명하거나 묘사할 수 없다. 이것은 직접 체험해본 사람만이 아는 성질의 감격이다. 그저 뜨거운 것이 뭉클하게 눈을 달궜다. 내일 이면 벌써 태어난지 4주가 된다. 한달. 처음 2주간은 비무장지대같은 평화와 긴장이 공존하는 산후조리원에서 바뀔 삶의 전초를 관망했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하나의 선을 넘었다는 걸 실감했다. 아빠가 되었구나. 잠을 푹 못 자는구나. 트림시키느라 팔이 내 팔이 아니구나. 등등등. 이미 부모가 된 선배들이 말했던 현실이 도래했다. 뭐가 불편한지 자지러지게 우는 아들을 겪으며 그 울음의 신호를 배워나갔다. 보통 네가지 범주에서 그 울음은 해결이 된다. 1.배고픔.2.기저귀.3.잠투정.4.트림 부족으로 속 더부룩함. 이 범주에서 해결되지 못한 어떤 날은 지치기 시작한다. 아기의 울음은 울음이 아니라 의사 표현인데, 그걸 캐취 못한 부모의 심정은 사색이 되어간다. 나는 평소에 감각이 예민하고 비위가 약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똥기저귀 갈 때, 나는 심히 기분이 좋다. 아기가 건강한 변을 보고 새 기저귀의 깨끗함으로 기분이 좋을때, 나또한 기쁘다. 입안의 밥을 오물오물 씹으면서도 기저귀 가는 손놀림은 경쾌하다. 몇초 만에 총기 분해 소지 하듯 착착착. 수차례 아기의 오줌을 맞아 보니까 이렇게 되더라. 이름을 드디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