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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티풀 보이. 2019

쪼잔하게도? 이 영화를 보고 와서 집에 있는 사탕류를 감춰버렸다. 요즘들어 아들이 단것에 너무 집착을 보여 어쩔 수 없이 하나만 하나만 하는 귀여운 손짓에 속절없이 무너졌다. 금지하면 욕망을 낳는다지만 계속 먹게 내버려 둘 순 없는 처지. 자식을 키우며 사소한 것에도 딜레마에 맞닥뜨린다. 하지마. 위험해. 그건 안돼. 를 수십번 반복하게 되는 현실, 과연 나는 아들을 위해 잘 하고 있는 걸까? 얼마전 보았던 벤 이즈 백이 아들을 바라보는 엄마의 입장에서 서술하였다면 이 영화는 아버지와 아들의 심층적 관계를 더 깊이 파고든다. 마약중독자 가정이 어떤 고통을 받고 인내하는지를 다룬 쌍둥이 같은 영화라 같이 보는걸 추천한다. 영화를 보면서 눈가에 눈물이 번져나갔다. 아버지의 심정에 빙의 되어 안쓰럽고 먹먹하고 가슴이 찢어졌다. 저렇게 이쁜 아이들이 약물에 빠져 좀비처럼 변해가는걸 목도하면서 영화속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왜? 왜?를 화두처럼 묻게 된다. “네가 중독된 게 내 잘못이 아닐까.” 영화를 보고 나서 내 나름의 결론을 냈고 지금은 원작인 책을 보고 있는데, 영화에서도 표현됐듯이 부모의 이혼이 남긴 상처들이 아이의 마음에 큰 구멍을 낸 것이 원인이라고 생각된다. 5살 밖에 안 됐는데 엄마 만나러 왔다갔다 혼자 비행기 타야하는 삶. 아빠가 새엄마랑 결혼할때 소년의 표정이 말해주는건 가슴속 불안, 공허와 결핍이 눈에 비춰졌다. 직전에 …

벤 이즈 백. 2019

벤이 돌아왔다. 제목대로 벤이 돌아왔는데 긴장감이 흐른다. 그는 약물 중독 치료를 다 마치기 전 집에 돌아온 것이다. 일년전 크리스마스 시즌에도 집에 돌아와 사고를 친 모양이다. 엄마는 일면 아들을 반기지만 내심 불안하다. 불안과 초조의 눈초리. 77일째 약을 끊은 아들을 믿어 보지만 결국 중독자의 소용돌이에 휩쓸린다. 내용은 하루동안의 소동이지만. 마약중독자의 가정은 단순하지가 않다. 중독자를 둔 가족이 얼마나 힘들지를 엄마역의 줄리아 로버츠와 아들역의 루카스 헤지스의 명연기에 가슴이 절절하다. 다 포기해도 엄마만은 아들을 끝까지 믿고 지키려 노력한다. 피눈물 나는 헛된 수고와 기대의 반복. 그 심정의 절박함이 긴장감을 만든다. 그가 다시 마약을 할까 말까 아슬아슬하게 몰입감이 질문하게 된다. 왜 (그들은) 그토록 마약에 취약할까? 이 영화에 이어서 현재 개봉한 뷰티풀 보이를 보면서 아버지의 심정으로 울었고 중독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그린북. 2019

영화 ‘말모이’를 보러 갔다가 이 영화의 포스터를 보고 단번에 느낌이 왔다. 무척 괜찮은 영화일꺼란 확신이 단 한장의 포스터 사진으로 전해졌다면 최고의 영화 포스터 아닌가. 요즘은 영화를 챙겨 보기도 힘들어 좋은 작품에 대한 정보도 전혀 없다. 그저 삶의 우연에 맞닥드려 명작을 만나는 기쁨은 그만큼 크다. 제목도 포스터속의 두 인물들도 생소했다. 살쪄 둔해 보이는 거구의 남자는 내가 좋아라 하는 영화 ‘캡틴 판타스틱’의 아버지 였다. 비고 모텐슨. 여태 ‘반지의 제왕’을 안 봤는데 이 배우 때문에라도 이젠 챙겨 봐야 겠다는 결심이 섰다. (다만 아무래도 재개봉하는 극장에서 봐야겠지.) 포스터에서 짐작하듯이 로드무비이자 버디무비이며 인종차별이 살벌한 과거 미국의 모습을 목도할 수 있다. 나한텐 영화를 보는 가장 큰 즐거움이 이런 것이다. 가보지 않은 풍경, 가볼수 없는 시간을 여행할 수 있는 체험, 거기다가 좋아하는 시대의 유행 음악을 접하는 즐거움까지 더하니 저절로 몰입 될 수 밖에 없다. 이런 주제의 역사적 사실을 그렸던 영화들은 어쩌면 뻔한 클리쉐의 함정을 가지고 있다. ‘헬프’ 나 ‘히든 피겨스’가 그랬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넘어선 이상한 재미와 매력이 있다. 인물 내면의 속마음이 보이는데 그것들의 솔직한 부딪힘들이 탁구공 주거니 받거니 하듯이 똑딱거리는 감정을 보여준다. 나중에 알았는데 이 영화의 감독은 피터 …

윈터스 본. 2010

이 영화는 바로 직전에 보았던 영화 ‘흔적없는 삶’ 감독의 작품이다. 감독의 연출이 너무 좋았기 때문에 호평 받은 전작은 또 어떨까 싶어서 찾아서 보았다. 제니퍼 로렌스란 스타 탄생의 서막 같은 영화다. 제니퍼 로렌스에 의해, 제니퍼 로렌스를 위한 각별한 영화다. 미국 시골(미주리주 어느 동네)의 찢어지게 가난한 가정의 큰딸이 17살의 제니퍼 로렌스인데, 아빠가 범죄에 연루되 감옥에 갔다 집을 담보로 보석금을 내고 출소한 이후 사라졌다. 문제는 다가오는 재판에 출석을 안 하면 담보로 잡힌 집이 넘어간다. 정신이 온전치 않은 엄마와 어린 두 동생을 돌보며 하루하루 끼니 걱정을 하며 살아간다. 집이 사라질 위기에 처한 그녀는 백방으로 수소문 하지만 사람들은 이상할 정도로 냉랭하다. 차디찬 겨울의 피폐한 풍경들, 가난에 쪼그라든 주름과, 배려나 동정에 궁색한 영혼없는 눈빛의 사람들. 21세기 최강국 미국의 민낮은 적나라 했다. 마치 1930년대 경제공황때 미국 농촌의 참혹한 현실을 사진으로 기록했던 사진작가 도로시아 랭이나 워커 에반스 사진속 이야기를 영화로 풀어쓴것 같다. 아빠의 실종이란 데이빗 린치 감독의 전매특허인 기괴한 미스테리를 첨가해서 말이다. 아빠가 무얼 했길래 찾아가는 사람마다 저렇게 냉정할까. 이 마을의 미스테리는 마약제조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처음엔 아빠를 찾는게 목적이었지만 종국에는 아빠의 생사 확인이 더 중요해졌다. 그것도 확증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죽음이 …

흔적없는 삶. 2018

숨은 보석같은 영화였다. 내가 아빠가 되었기 때문에 잔잔한 울림이 더 컸는지도 모르겠다. 설명하지 않고 덤덤히 보여주기만 해도 그들의 삶의 선택에 동화되었다. 미국 오레건주 포틀랜드 외곽의 국유지 숲속에서 한 부녀가 산다. 왜, 언제부터, 숲속에서 노숙을 하는지 모르지만, 많은 대화가 없어도 아빠와 딸의 각별한 사이는 범죄에 연관되어 도피하는 삶 보다는, 어떤 트라우마로 인한 세상으로부터의 탈출이 명확해 보인다. 아빠 역의 배우 벤 포스터는 참전용사 이미지가 강했는데 사회복지사의 질문에서 언듯 그랬던 과거를 유추할 수 있었다. 최소한의 대화로 연기하는 그의 무표정에서 더 많은 마음의 굴곡을 느낄 수 있었다. 사회 제도를 벗어나 자연인이 되고자 하는 그의 의지 속에는 아픔이 녹아 있기 때문에 무어라 설명할 수 없어도 관객의 마음을 울린다. 다만 10대 중반인 딸의 입장은 달랐다. 숲속에서의 삶이 무척 자연스럽고 익숙했지만, 우연한 실수로 공권력에 의해 강제로 사회에 편입되, 새로운 삶을 맞이한다. 딸은 사회복지사가 마련해준 정착된 환경을 마음에 들어한다. 친구를 사귀고 사람과의 관계망속으로 서서히 들어간다. 하지만 아빠는 주거의 대가로 노동을 하는 일련의 사회화에 심한 염증을 느낀다. 말로 표현되지 않는 그의 고뇌는 사연모를 그의 사정과 함께 내적 고통을 야기 시킨다. 결국 다시 숲으로의 귀환을 일방적으로 통보하고 딸은 아쉬움을 뒤로한채 묵묵히 아빠의 길을 따라 나선다. …

보헤미안 랩소디, 2018

퀸의 팬들은 이 영화에 탐탁치 않은 시선과 박한 평가를 하는듯 하고 오히려 퀸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이 영화의 매력에 빠져드는 듯 하다. 퀸의 팬들은 퀸이 프레디 머큐리다 란 생각보다는 멤버 각각의 역량과 밴드로서의 퀸을 절대적으로 옹호한다. 물론 밴드의 보컬리스트인 프레디 머큐리의 존재는 절대적으로 대체불가다. 퀸의 전기영화이지만 그 중심엔 한창나이, 마흔다섯에 에이즈 합병증으로 죽게된 프레디 머큐리의 드라마가 펼쳐진다. 1985년 웸블리 스타디움에서의 라이브 에이드 공연을 앞두고 카메라는 과거로 회기한다. 전형적인 전기영화의 코드를 차곡차곡 밟아 간다. 프레디 머큐리와 기타리스트 브라이언 메이, 드러머 로저 테일러와 만나는 역사적인 순간부터 밴드가 성장하는 순간들을 우리는 유쾌하고 경이롭게 바라본다. 프레디 머큐리의 삶과 밴드 멤버들의 우정과 우여곡절 와중에 퀸의 명곡들은 아주 명징하게 흐른다. 록음악은 이렇게 들어야 제 맛이다. 모기 왱왱거리듯 작은 볼륨의 소음이 아닌 오감을 자극하는 출력은 감각을 황홀하게 한다. 일반 극장에서도 좋았는데 아이맥스나 사운드에 특화된 상영관에선 더 좋았을 듯 하다. 출연 배우들과 실존 멤버들과의 싱크로는 대단하다. 주인공 프레디 머큐리가 가장 안 닮았고. 기타리스트 브라이언 메이는 놀라울 정도다. 알다시피 프레디 머큐리는 인도/파키스탄계 였고 앞니가 독특한 외모를 보형물로 표현했는데 개인적으론 눈에 계속 거슬렸다. 반면에 이 배우의 눈빛 연기가 압권이었다. 음악 외 적으로 감정적인 몰입을 유발했다. …

잉글랜드 이즈 마인. 2018

80년대 영국 가수 하면 우리는 듀란듀란, 왬의 조지 마이클, 컬처클럽의 보이 조지, 퀸의 프레디 머큐리 정도를 알래나. 듀란듀란은 문화방송에서 생중계? 내한공연을 해주기도 했었다. 순정 만화의 남자 주인공들이 하얀 옷에 기타 메고 연주하니 누나들이 까무라치는 광경들이 생생하다. 그들과 동시에 80년대 중반 영국에선 The Smiths 란 밴드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들은 90년대 브릿팝의 아버지, 선구자, 일 수도 있겠다. 쟁글쟁글한 기타 사운드에 현학적인 가사, 곧 스톤 로지스가, 이어서 스웨이드-블러-오아시스가 그런 계보를 이어가며 브릿팝은 세계를 제패했다. 우리에게 생소한 이 스미스란 밴드는 영화 ‘500일의 썸머’에서 남.녀 주인공이 좋아하는 밴드다. 스미스의 음악이 중요한 연결고리로 나온다. 그 외에는 이 밴드의 활동 기간은 짧았고 지극히 영국적인 특성이래서 팝 음악에 조예가 깊지 않다면 이 밴드의 보컬리스트 이자 작사가인 모리세이(Morrissey 모리씨 라고도 부른다)는 더욱 생소한 존재다.(밴드가 해산하고 오래 솔로로 활동을 했다해도) 참고로 2012년에 모리세이는 한차례 내한공연을 했음. 이 영화는 모리세이의 젊은 시절, 즉 ‘더 스미스’가 결성되기 바록 직전까지의 한 인물의 성장기를 다룬다. 가장 비슷한 영화로는 존 레논의 비틀즈 탄생 이야기인 ‘노웨어 보이’가 생각난다. 둘 다 영화의 끝맺는 지점이 ‘이렇게 역사의 발걸음은 시작되었다.’ 식의 마무리여서 아무래도 이 뮤지션들의 팬들이 보는 감흥과 일반인이 보는 입장이 사뭇 다를 …

어느 가족 2018

역시나 이 거장의 신작은 실망시키는 법이 없다. 황금종려상 수상작이라는기대감을 가득 안고 봤는데도 충분히 만족하다 못해 그 여운이 길게 남는다. 일본이라는 달의 어두운 저편을 꽤 온화하게 전달한다. 인물의 행색이나 배경은 궁핍하기 그지 없지만 한지붕 아래의 그들은 전혀 초라하지 않았다. 좁고 지저분한 공간들. 꿰줴줴한 피부. 더위와 습도가 화면밖을 뛰쳐나올 기세의 끈적거림 등등. 다큐멘터리 연출가 출신의 감독답게 리얼하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감독의 강점은 사회적 다큐의 주제를 자기만의 색깔을 가진 톤으로 승화시킨다는점이 아닐까. 주제나 표현 모두 영화 예술의 궁극점에 도달했다. 일본(일본인의 의식)이라는 나라는 깃발에서처럼 태양을 숭상하지만 실은 달 같은 면이 많은 것 같다. 보름달의 몽환에 취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어둠이 그늘을 드리우고 도통 속을 알 수 없는 묘미에 취한다. 또 그 어두운 이면에는 무엇을 감추고 있을까. 누구나 일본을 가보고 받게 되는 첫 인상은 깨끗하고 친절하고 질서정연한 느낌일 것이다. 시민의식은 배울점이 많이 보인다. 그러나 관광객의 시선에서 관찰자의 시선으로 조금만 옮기면 일본은 무궁무진한 탐구의 대상이 된다. 일본인으로서의 감독의 눈에도 일본은 성찰과 비판의 대상이 되어 보인다. 작금의 일본사회가 갖고 있는 문제들이 촉발한 현상들을 보여주면서 조롱하듯 카운터 펀치를 날린다. 경제 침체로 인해 가속화된 개인주의와 가족의 붕괴 속에 이 좀도둑 가족이 살아가는 방식을 통해 진짜 중요한 …

악마를 보았다. 2010

이 영화를 왜 보려 했을까. 이제와서,, 나는 잔인하고 적나라한 폭력씬이 두렵다. 현실보다 극대화한 영화 감상은 충격을 넘어 고통이 전염되는듯 하다. 이 영화는 김지운 감독보다는 박찬욱 감독이 더 잘 어울려 보인다. 각본을 쓴 박훈정 감독은 세간에 천인공노할 범죄에 대한 네티즌들의 분노에 찬 악플을 보면서 그것을 영상으로 찍어보면 어떨까. 에서 영화의 모티브를 얻었다고 한다. ‘ 저런 놈은 아킬레스건을 끊고 사타구니를 오함마로 아작을 내고 아가리를 찢어 죽여야해’ 뭐..이런 식의 분노 표출을 영상화 한. 내가 이 영화를 볼려는 계기가 이 영화의 시작과 비슷하다. 요 근래에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악이 선한 사람을 해치는 어처구니 없는 사건 사례들을 보며 분노를 금할 수 없었는데, 내 자식이 내 가족이 저런 일을 당하면 나는 어떻게 할까. 란 누구나 할 법한 상상에서 이 영화가 생각났다. 너무 잔인하다고 해서 봉인해 둔 영화였는데, 이제서야 해제 했다. 복수라는 되게 단순한 구조를 가진 영화였다. 최민식이 악마 같이 나쁜놈 이었는데, 인간성을 상실한 사이코패스니 악역의 평면성은 어쩔 수 없었다. 그나마 마지막 자신의 가족에 의해 죽을 때 인간적인 공포를 느끼긴 했지만, 누구나 인간의 내면에 가진 선과 악의 딜레마가 아닌. 절대 악과. 그 악을 처단하기 위한 또다른 악마적 복수. 이 과정의 사실적 액션은 카타르시스를 …

소공녀 (2018)

뒤늦게 이 영화를 보았다. 이윤기 감독의 [멋진하루]를 봤을 때의 즐거움이 떠올랐다. 일상의 소박한 로드 무비는 타인의 삶을 엿보는 희열을 준다. 주인공이 만나게 되는 다양한 사람들을 통해 우리는 인간군상들을 더 잘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다. 거두절미 하고 이 영화의 특정 씬에서 나는 큰 감명을 받았다. ‘아! 좋은 연기란 이렇게 무의식의 영역까지도 울림을 주는구나.’ 주인공 미소가 한대용(배우 이성욱)을 만나는 에피소드는 정말 뭉클했다. 타인의 절절한 아픔에 측은지심으로 나까지 눈물을 찔끔 짜는 정도였다. 나는 이러한 점이 (영화)예술의 가장 강력한 힘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마음이 닿아 부딪혀 폐부를 찌르고 어루만져주어 더 이상 자기 안의 뭔가가 흐르거나 텅 빈 상태를 방치하는 것이 아닌 자기 치유의 상태. 상대를 바라보지 못하는 시선과 갸날프게 떨리는 억양, 맥아리 없는 말꼬리. 단숨에 감정이입되었고 그의 사연 모를 슬픔은 우리들 공동의 불안에 기대어 있는게 아닌가 싶다. 배우자에 버림받고, 부동산의 덧에 걸려 빛에 허덕이는 상황. 누구든 저런 상황이면 우울증에 안 걸리겠나. 미소가 정성스레 밥을 차리고. 청소를 해 주고 같이 담배 피며 이야기를 들어 주는 것 만으로도, 그는 절망을 벗어나 한 발을 디딜 수 있는 희망을 얻은 거였다. 몇년전 십여년만에 다시 찾은 뉴욕에는 젊은 거지들이 꽤 많았다. 그들의 특징은 조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