쪼잔하게도? 이 영화를 보고 와서 집에 있는 사탕류를 감춰버렸다. 요즘들어 아들이 단것에 너무 집착을 보여 어쩔 수 없이 하나만 하나만 하는 귀여운 손짓에 속절없이 무너졌다. 금지하면 욕망을 낳는다지만 계속 먹게 내버려 둘 순 없는 처지. 자식을 키우며 사소한 것에도 딜레마에 맞닥뜨린다. 하지마. 위험해. 그건 안돼. 를 수십번 반복하게 되는 현실, 과연 나는 아들을 위해 잘 하고 있는 걸까?
얼마전 보았던 벤 이즈 백이 아들을 바라보는 엄마의 입장에서 서술하였다면 이 영화는 아버지와 아들의 심층적 관계를 더 깊이 파고든다. 마약중독자 가정이 어떤 고통을 받고 인내하는지를 다룬 쌍둥이 같은 영화라 같이 보는걸 추천한다.
영화를 보면서 눈가에 눈물이 번져나갔다. 아버지의 심정에 빙의 되어 안쓰럽고 먹먹하고 가슴이 찢어졌다. 저렇게 이쁜 아이들이 약물에 빠져 좀비처럼 변해가는걸 목도하면서 영화속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왜? 왜?를 화두처럼 묻게 된다. “네가 중독된 게 내 잘못이 아닐까.”
영화를 보고 나서 내 나름의 결론을 냈고 지금은 원작인 책을 보고 있는데, 영화에서도 표현됐듯이 부모의 이혼이 남긴 상처들이 아이의 마음에 큰 구멍을 낸 것이 원인이라고 생각된다. 5살 밖에 안 됐는데 엄마 만나러 왔다갔다 혼자 비행기 타야하는 삶. 아빠가 새엄마랑 결혼할때 소년의 표정이 말해주는건 가슴속 불안, 공허와 결핍이 눈에 비춰졌다.
직전에 보았던 벤 이즈 백도 그렇고. 커트 코베인의 삶도 그렇고 부모의 이혼이 가져온 아이들의 상처는 무언가 중독적인 것과 결부된다. 파멸적인 록 음악에 심취하기도 하고 그림이던 게임에 탐닉하기도 하지만 마음만 먹으면 구할수 있는 미국에 널린 마약은 도가 지나쳐도 한참 지나친 것 같다. 미국이 살기 좋아보이지만 그 사회의 얕은 이면에는 마약의 구렁텅이가 어디든 도사리고 있다는 무서움이 몸서리 쳐진다. 남미에서 북미로 공급되는 마약을 보면 그 옛날 남미문명을 난도질 했던 백인들에 대한 복수라도 하듯이, 백인 중산층 가정에 중독자들이 유독 많다고 한다. (러스트 벨트의 기업들이 재가동하면서 취업하는 백인들의 숫자가 그리 많지 않다고 한다. 약물 복용건으로 건강 검진에서 많이 탈락한다고)
음악과 사운드의 활용이 탁월하다. 아들 닉 쉐프의 방에는 너바나와 멜빈스 포스터 등등이 있었는데 실제로 너바나의 territorial pissings 이 흘러나올때 10대 때의 나의 내면을 생각나게 했다. 공허함에 다양한 록 음악을 탐닉하던 그 때의 나는 호기심에 담배를 입에 댔지만 미국의 아이들은 마리화나를 시작하고 점점 더 강력한 무언가를 찾아나가는 것이다. 관문이론은 맞다.
분명 마약을 대하는 사회적인 풍토가 확실히 다른것 같다. 60년대를 거친 그들의 부모세대들은 각종 환각제. 마약류에 탐닉하던 혁명적 세대였다. 그들의 대중(음악)문화는 어쩌면 환각상태의 결과물이다. 비틀즈도 그러했고 미국의 전직 대통령 들도 젊을땐 그랬다고 한다. 문제는 그 때의 마약보다 현재의 마약은 훨씬 사악하다고 한다. 코케인, 헤로인등은 성분이 더 강해졌고 영화속 아들이 탐닉하는 크리스탈 메스가. 우리가 흔히 말하는 히로뽕, 필로폰, 메스암페타민이 다 같은 걸 지칭한다는걸 알았다. 아버지가 아들의 문제를 파악하려 공부하고 전문가에 자문하며 심지어 스스로 슬럼가에서 약을 구해 복용해 보기도 한다. 개인이 가진 문제를 대처하는 방식으로 선택한 약물을 단지 범죄가 아닌 질병으로 접근하는 태도가 우리와는 확실히 다르다.
영화 보는 내내 내가 사랑하는 뮤지션 존 프루시안테가 떠올랐다. 그렇게 어려운 중독을 떨쳐버리고 비상했던 그의 눈부신 과거와 현재가 더욱 대단하게 느껴졌다.
훗날 아들과 함께 이때 느낀 감정을 공유하고 싶다. 위기였지만 슬기롭게 헤쳐나갔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