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보석같은 영화였다. 내가 아빠가 되었기 때문에 잔잔한 울림이 더 컸는지도 모르겠다. 설명하지 않고 덤덤히 보여주기만 해도 그들의 삶의 선택에 동화되었다.
미국 오레건주 포틀랜드 외곽의 국유지 숲속에서 한 부녀가 산다. 왜, 언제부터, 숲속에서 노숙을 하는지 모르지만, 많은 대화가 없어도 아빠와 딸의 각별한 사이는 범죄에 연관되어 도피하는 삶 보다는, 어떤 트라우마로 인한 세상으로부터의 탈출이 명확해 보인다. 아빠 역의 배우 벤 포스터는 참전용사 이미지가 강했는데 사회복지사의 질문에서 언듯 그랬던 과거를 유추할 수 있었다. 최소한의 대화로 연기하는 그의 무표정에서 더 많은 마음의 굴곡을 느낄 수 있었다. 사회 제도를 벗어나 자연인이 되고자 하는 그의 의지 속에는 아픔이 녹아 있기 때문에 무어라 설명할 수 없어도 관객의 마음을 울린다. 다만 10대 중반인 딸의 입장은 달랐다.
숲속에서의 삶이 무척 자연스럽고 익숙했지만, 우연한 실수로 공권력에 의해 강제로 사회에 편입되, 새로운 삶을 맞이한다. 딸은 사회복지사가 마련해준 정착된 환경을 마음에 들어한다. 친구를 사귀고 사람과의 관계망속으로 서서히 들어간다. 하지만 아빠는 주거의 대가로 노동을 하는 일련의 사회화에 심한 염증을 느낀다. 말로 표현되지 않는 그의 고뇌는 사연모를 그의 사정과 함께 내적 고통을 야기 시킨다. 결국 다시 숲으로의 귀환을 일방적으로 통보하고 딸은 아쉬움을 뒤로한채 묵묵히 아빠의 길을 따라 나선다.
자연으로의 회기 조차도 국가의 통제를 받는다. 복지의 틀을 야반도주하며 벗어난 부녀는 흔적없이 다시 숲으로 파고든다. 족히 몇백년은 되 보임직한 나무들, 사람이 발길이 닿지 않은 원시적 숲 속에서 딸은 탈진하고 지극한 사랑으로 아빠는 보살핀다. 가까스로 버려진 오두막을 발견하고 다시 아빠는 식료품을 사기 위해 하산 하는 도중 실족사고를 당한다. 어쩔수 없이 작은 사회 공동체에서 재활을 하는데 여기의 삶은 너무 고립되진 않으면서 적당히 자연주의적 사회화가 이루어진 이상적인 생활이었다. 딸은 공동체의 정과 자신의 삶의 방향을 어렴풋 깨닫는다. 다시 떠나자고 하는 아빠에게 딸은 자신의 속마음을 밝힌다. 아빠의 보살핌을 벗어나 당당히 자신이 선택한 삶을 살고자 하는 의지와 열망. 하지만 부녀가 헤어져야만 하는 가슴아픈 순간. 이 영화의 감동은 이런 것이다. 설명하지 않고 묵묵히 보여준다.
사회에 남은 딸은 숲속에 살아가는 그 누군가를 위해 주기적으로 식료품 자루를 나무에 매달아 둔다. 숲속에 웅크린 자들이 최소한의 위급상황을 견딜 수 있게.. 아빠가 그런것처럼 그들의 선택을 존중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