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아침이 정말 좋았다. 나이가 들수록 아침에 일어나는게 힘들지 않다. 더더욱 텍사스의 아침은 탁틔인 풀밭에 맺힌 이슬이 싱그러워, 매일 촉촉한 풀을 밟으며 아침을 먹으로 가는게 즐거웠다. 아침의 커피와 사과는 몸을 깨운다. 맑은 공기와 뜨거운 샤워로 하루를 연다. 한낮의 더위가 오기전 이 아침이 유독 그립다. 이런 아침이라면 전원생활의 무료함은 절대 없다. 하늘과 땅. 새와 별이 마음을 분주하게 했다. 더불어 언어의 곤혹이 쉼없이 이어졌다. 언어로 인한 정신적인 퇴행은 쉽게 적응하기 힘들었다. 나는 노출되어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숨고 싶었다.
한달이 지나니, 몸은 둔해져 있었다. 점심, 저녁 식사를 샐러드 바 위주로 바꿨다. 채소 위주로 식사하니 몸은 확실히 가벼워진다. 이때 즐겼던 조깅은 너무나 완벽했다. 달리기의 즐거움은 배가 되었다. 그리고 이상기후도 즐거움의 한 몫 이었다. 유독 그해는 비가 많이 오는 거라 했다. 그렇게 많은 천둥과 번개가 치는것도 신기하고 토네이도가 지나간 자리는 분노한 킹콩이 지나간 흔적 같았다. 그날도 하늘이 범상치 않았다. 세찬 바람과 저 멀리 뭉텅구름에선 번쩍번쩍 난리도 아니었다. 비가 흩내렸고 들판에 나오니 머리위 낮은 구름도 요동쳤다. 달리기 구간엔 나무 하나 없는 들판을 한동안 지나야 하는데, 번개 맞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머리에 스쳤다. 참 스릴넘치는 달리기 였다. 경이로운 대 자연의 작용을 몸으로 만끽하며 죽지 않을 정도로 번개를 맞아 영어를 하루 아침에 잘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가슴 벅찬 순간이 많았다. 대부분 자연의 경이적인 변화에 대한 찬사 였지만 간혹 파란눈의 텍사스 금발 아가씨와 썩 부드러운 스몰 토크를 하고 나면 괜히 기분이 좋았다.
나는 아마존과 연애에 빠졌다. 아마존은 나의 친구이자 사랑스런 연인이었다. 자기 차가 없는 이곳에서의 삶은 시간이 지날 수록 갑갑했다. 차를 얻어타고 근교 마을의 월마트에 가는 것도 많이 싱거워졌다. 아마존에서 주문한 물건이 내게 전달되는 것은 마치 외부세계와의 접촉 같은 느낌이 들었다. 상품을 통한 연결은 희열을 가져다 주었다. 이 넓은 땅에서 내가 받아 볼 물건이 어디서 출발했고 어디쯤에 와 있는지 구글 지도를 보며 학수고대했다. 한적한 도로를 달리는 초코렛 색 UPS 배송 버스만 봐도 기분이 좋았다. 그들은 현실의 산타클로스였다. 아마존의 혁신은 프라임 배송일 경우 미국내 2일 배송이란 점이다. 한국에선 너무 당연한 것도 이 넓은 땅에서는 대단한 것이 된다. 또한 배송비가 무료였기 때문에 자잘한 것도 부담없이 자주 이용했다. 월마트와 아마존이 없었더라면 미국에서의 삶의 질은 큰 폭으로 하락했을 것이다. 이것은 분명 지극한 자본주의적 삶의 양식의 한 부분 이었다.
뜨거운 텍사스의 태양은 땀이 나오자마다 증발시킨다. 나는 질 좋고 맛있는 스테이크로부터 나를 구해야 했다. 중독성이 있었다. 얼음이 든 차고 두꺼운 유리잔에 코카콜라를 부어 목을 축인다. 소고기의 느끼함과 콜라의 조합은 김치 이상으로 어울렸다. 더욱이 뜨거운 여름이라면 말 할 것도 없다. 비록 짜기는 했지만 땅콩을 좋아하는 내게 텍사스 로드 하우스의 무제한 제공 땅콩은 신났다. 다행히도 내 차가 없었기 때문에 이곳을 그리 자주는 못 갔다. 만약 자유로웠다면 체인 레스토랑을 죄다 돌아다니며 텍사스의 기름진 음식을 만끽하며 여기의 식문화에 동화됐을거다.
아무래도 텍사스는 대도시의 삶의 양식 보다는 시골적인 면이 다분해서인지 다양한 인사법(Greeting)이 발달했다. 형식적인 겉치레라도 딱딱하고 삭막한것 보다는 낫다. 달리기를 하다가도 마주오며 지나치는 차량에서 손을 흔든다. 드넓은 곳에서의 마주침은 어떤 경계심을 갖게 마련인데 이때 인사는 ‘나는 나쁜 사람이 아니에요. 나는 총이 없어요.’ 라는 메시지를 전달 하는 듯 하다. 때론 저 멀리 먼저 큰 소리로 내 존재를 알린다. 아마도 서부개척시대를 거치면서 악당이 아님을 밝히고 선한 의지를 증명하는게 몸에 배인 듯 해 보인다. 같은 맥락으로 우리나라에서도 산행중에 지나치는 등산객끼리 인사를 나눈다.
왔썹 하는데. 왔썹 하며 응수하는게 영 익숙치 않아 자주 머뭇거렸다. 상점에 들어가도 하우아유 이상으로 다양한 인사를 건넨다. 보통 아임 굿, 하우아유 하게 마련이지만, 날씨에 대해 말을 건네기도 하고, 카메라를 든 내게 호기심을 보이기도 했다. 내가 느낀 바로는 텍사스주가 비교적 잘 사는 곳 이어서 인지 사람들이 밝고 우호적 이었다. 디트로이트나 시카고였다면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나는 타운 안의 쇼핑몰 주차장에서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쇼핑을 마친 흑인 부부가 자신의 차로 가는 중에 내게 정중히 사진을 찍어 달라고 했다. 사진을 찍을 대상을 사냥감을 노리는 젊은 숫사자 마냥 호기심 어리게 두리번 대던 나에게 그들은 불쑥 들어왔다. 이 얼마나 선물 같은 제안인가. 사진을 통한 즉흥적인 소통 이었다. 몇 컷의 사진을 찍고 이메일 주소를 받고 인사를 나누고 헤어진지 5분만에 다시 그 남편이 내게로 다가왔다. 그러곤 내게 지폐를 건넸다. 상황이 바로 이해되진 않았지만 만류하던 내 손을 뿌리치고 셔츠 가슴팍에 있는 주머니에 그 달러 뭉치를 쏙 집어놓고 그는 잽싸게 발길을 돌렸다. 그것은 팁 이었다. 구겨진 달러 다섯장을 펴 보고 마음이 이상해졌다. 나는 뷰파인더의 사진을 확인하며 방금전 순간의 여운을 되집었다. 나 스스로 이방인의 감성으로 어슬렁 거렸지만 어떤이는 스스럼 없이 다가와 호의를 베풀었다. 비극은 그날 저녁에 사진 편집을 마치고 이메일을 써서 보냈지만 자꾸만 반송되었다. 아이폰 메모에 타이핑했던 이메일 주소가 문제였다. 차라리 노트와 펜 이었다면 이런 치명적 실수는 없었을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