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델라 유축기로 아기가 먹다 남은 젖을 짜는 아내의 모습을 보면 격세지감을 느낀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성적 흥분의 대상이자 마음의 안식처였고, 연애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면 어디 한번 손길을 닿을 수 있을까 노심초사 호기심의 욕망의 성소였던 아내의 유방은 더이상 나의 것의 아니다. 곤히 엄마 품에 안겨 젖을 빠는 아기의 모습은 행복의 나라로 가는 계단을 오르는 느낌이다. 엄청 커졌지만 에로틱이 제거된 아내의 가슴은 여전히 아름답다. 젖짜는 방안의 풍경이 간혹 이질적인 일상의 기묘한 느낌을 자아내지만 마흔살이 넘은 남자는 이제 더이상 여자 가슴에 애착을 거둘 때도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기는 젖에 대한 집착이 크다. 아기니까 당연하지만 한가지 문제가 있다. 산후조리원에서부터 잘못된 습관이 몸에 밴 것인데, 젖을 먹다가 스물스물 잠들어 버리는 것이다. 잠결에 간헐적으로 젖빠는 것을 내비두었더니, 잠을 자려면 무조건 젖을 찾는 땡깡이 심해졌다. 좋은 습관을 자녀에게 유도하고 실천시키는게 부모의 큰 역할일텐데 처음부터, 실패를 맛보고 있다. 잠에서 깨자마자 젖을 찾는 것을 보면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뭔가를 바로 먹어야 하는 나를 닮은것 같다. 또한 분유를 먹고 자랐다는 나는 엄마 젖에 대한 욕구불만이 아들한테 전해진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미취학아동이었을때 나는 우리집 옆방 셋집 새댁이 갓난아기엄마였는데 가슴을 풀어헤치고 커다랗고 빵빵한 젖을 번갈아 가며 먹이는 모습을 매일 창문에 턱을 괴고 한없이 쳐다보았다. 부풀어 오른 젖가슴에 돋아난 푸른 정맥혈이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난다. 엄마는 그러한 나를 보며 한마디 했다. “쟤가 엄마젖 못 먹고 자라서 부러워서 저러나 보다.” 젖먹던 힘까지 온 힘을 다해서 란 말이 있는데 나는 그러질 못해서 지금도 악착같은 면이 없나 하는 생각도 든다. 이마에 열이 나도록 쌕쌕대며 젖빠는 아들의 모습을 보면 나의 신생아 시기가 보여진다. 설렁설렁 분유젖병을 물고 있는 내가.
한창 성에 호기심이 많은 중학교 시절, 역사 교과서에 나오는 중국의 항우와 유방 이야기는 그 내용은 나몰라라였고 교과서에 이렇게 야한 이름이 나와도 되나 하는 부끄러운 걱정이 앞섰다. 아마도 남자들은 그랬었다. 젖에 대한 욕망은 근원적이었다. 그 푹신한 품에 머리를 내려놓고 잠결에 취하고 싶은 욕구. 사춘기 시절 내가 느꼈던 애정결핍 감정의 근원은 이것이었다.
나는 이제 아들의 젖을 탐내지 않는다. 아빠라는 호칭은 젖에 대해 초연해 지는 시기에 완성되어간다.
여름의 젖들은 눈요기가 풍요롭지만 이마저도 덤덤하다. 나는 그저 편의점에 들러 소젖을 하나 사들고 집에 들어간다.
신체의 대상화에 혹자는 기분이 나쁠 수도 있겠지만 젖은 그 자체로 성스러운 것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