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 양호해
내 이름은 양호. 아빠가 지은 이름이다. 나는 28주차 태아다. 그러니까 아직은 태명인 것이다. 나는 이 이름이 마음에 든다. 양호하게 잘 자라라..는 의미도 그렇고 듣기에도 나쁘지 않다. 아빠는 한대수란 사람을 좋아하는데 그 사람이 평소에 양호 하다란 말을 많이 사용해서 그의 딸 이름에도 양호라고 지었다고 한다. 그는 가수였는데, 듣자하니 그다지 양호하지 않은 삶을 산 사람이었다. 아방가르드 한 인생을 산 그를 아빠는 동경했다. 아빠가 처음 신촌 거리에서 그를 맞닥뜨렸을 때 _ 안녕하세요. 선생님. 좋은 음악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_ 라고 말 했다고 한다. 그가 살아생전의 존 레논 에게 말했던 거처럼.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것은 정확히 언제 부터인지 모르겠다. 처음엔 멀리서 웅성대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렸다. 어디선가 꼬르륵 거리는 진동이 울릴 때에는 그 소리가 좀 더 선명해졌다. 벽에서 울리는 소리는 점점 또렷해졌다. 북소리 같이 두근득, 두근득 일정한 박자가 형성 되었고, 사방이 어두컴컴해도 나는 곧 모든 의식을 되찾았다.
어느 날 아빠는 이상한 목소리로 “물 좀 주쇼~ 목 마르요~” 라고 흥얼거렸다. 처음 듣는 노래였지만, 아빠는 노래를 썩 잘 부르지 못한다고 느꼈다. 그렇다고 듣기 싫은 건 아니었다. 한번은 엄마가 까르르 웃으며 배에 힘을 주는 바람에 나도 번쩍 눈을 뜨게 되었는데, 아빠 왈 “노벨상 탄 기념으로 밥 딜런 의 <블로잉 인 더 윈드>를 연습해 보려고~” 그러고선 한 소절을 부를 때 마다 엄마는 깔깔대며 배를 움켜잡았다. 내가 듣기엔 그렇게 이상하진 않았다. 아빠는 나를 위한 노래를 만들려고 자주 노력했다. 아빠가 애지중지 하는 마틴 통기타의 자연스런 울림이 내게로도 전해졌다. 허밍 소리로 어떤 멜로디를 자아냈다. 사랑이 느껴졌다. 동시에 연민이 흘렀다.
어제 엄마가 울었다. 두 번째 다. 겉으로는 무덤덤한 엄마일지라도 내가 뱃속에 들어참으로서 겪게 되는 호르몬의 변화에 감정의 기복이 큰 편인가 보다. 나는 그럴 때 면 잠자코 있었다. 아빠도 영문을 모른 채 말없이 뉴스를 보았다. 내가 막 잉태 되었던 가을의 그 날들은 여러모로 어수선했다. 최순실과 대통령은 가장 빈번히 들리는 소리였고 아빠는 번번이 “미친년, 미친년~” 이라고 길게 읊조렸다. 미친년 이란 탄식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엄마 뱃속에서의 이런 기억도 두 달 여 후면 까맣게 잊혀 진다. 내가 태어나는 순간 존재의 모든 기억을 잃는다. 첫 폐 호홉을 함으로써 오장육부의 신체 기운이 배치된다. 유전적인 요인 외에 우주에서 시시각각 내려오는 힘의 균형이 내 안에 각인된다. 그 때 내 기억은 리셋 된다. 내가 어디서 왔는지 어떤 존재였는지가 없어지는 그 순간에 나는 우렁찬 울음으로 애도할 것이다. 절대적 망각이 주는 두려움이 있다. 또다시 새로운 시작이다. 나는 내 존재를 망각한 채 또 다른 인생을 일구어 나가야 한다. 잊혀지기 전에 말 해 두자면, 나는 하나의 별 이었다.
인간은 가늠하지 못할 막대한 공간에서 영혼은 제각각 총총히 빛을 발한다. 그 절대의 공간에서 나는 침묵으로 지낼 수밖에 없다. 간혹 사람들이 명상 이라든지 기도라든지 하는, 깊은 진리를 갈구하는 행위를 추구하는데 이건 근본으로의 회기를 염원하는 것과 같다. 하나의 공(0)과 같은 상태로 나는 존재한다. 무게도 크기도 없다. 하나의 빛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천국을 상상하는 것은 생각과 언어 이전의 세계를 어렴풋 인지하기 때문이다. 무한한 자유와 만사형통의 완벽함에서.. 아마도 사람들이 신이라고 부르는 것에서, 하나의 빛이 되어 세상에 내려오게 되었다.
사실 나도 왜 이 세상에 내려오게 되었는지를 모르겠다. 그것은 매번 수수께끼였다.
인간의 굴레는 삶과 죽음이 완벽한 한 단락으로 마무리 되는 것에 있다. 개체의 삶의 기억은 이어지지 않고 단절 된다. 다만 각각 하나의 영혼만은 변함없다. 인간이 말하는 우주의 공간에서는 차원의 변이가 급속도로 이루어진다. 바람이 봄날의 꽃가루를 춤을 추게 하듯이 끊임없이 유동적인 흐름이 발생한다. 나의 핵심은 변치 않더라도 상황에 의해 나는 전이 된다. 거대한 그 흐름은 내가 통제 할 수 없다. 억겁의 시간 속에 다양한 삶은 이어졌다. 예측 불가능한 좌충우돌의 삶. 살아있는 모든 날이 내가 경험하는 처음의 날 들 이었다.
어느 날 번쩍, 나도 모르게 막 수정된 인간의 세포에 스며들었다. 하나의 스트로크, 비트가 시작되었다.
어제 엄마 아빠는 비온 뒤 봄날 밤의 선선함을 동네의 작은 뒷산에서 만끽했다. 풀 냄새가 풋풋했다. 나는 잠자코 기분 좋음을 만끽했다. 아빠가 신이 나서 말했다.
“저 별 좀 봐봐. 별빛이 아름답지 안어?”
“뭔 별?. 저거 인공위성이야.”
“말도 안 돼. 저게 어떻게 인공위성이야. 그냥 큰 별이지. 난 하늘의 별보고 인공위성이라고 말하는 사람 처음 봤네.”
“으이구, 인공위성이라니까. 별이 어떻게 혼자 덩그러니 있어.”
“지구랑 가까운 별이니까 저렇게 잘 보이는 거겠지.”
“아냐.”
“내 말이 마저, 저건 별이야.”
아빠는 푸념을 늘어놓았다. 아무래도 우리 코스모스를 읽어야겠다. 아니 어린 왕자를 다시 읽어야 하나.. 이런 식의 대화가 얼핏 두 번째였다. 그러면서도 그들이 연애시절 짜릿한 월광욕을 했던 추억을 이야기 했다. 그런 경험은 처음이자 마지막 일 것이라 했다. 분지 위, 망해버린 리조트의 광활한 주차장은 오로지 엄마와 아빠, 달 뿐이었고 반딧불과 함께 춤을 췄다고 한다. 달 빛 아래, 완벽한 아담과 이브가 되어 자연과 합일했던 추억은 이 연인들이 첫날밤을 치루기 전에 이미 한 쌍으로의 출발을 공고히 하는 것 이었다. 나는 그 찬란한 기억을 느낄 수 있었다. 그 행복감은 내가 엄마 뱃속에 자리 잡게 되는 동기 일 수 있다. 어쩌면 별을 부정하는 엄마에게 내가 증명이라도 하듯 떨어졌던 것이 아닐까.
나는 많은 유전적 정보를 밑바탕 삼아 음악을 작곡하듯이 물질들과 세포들을 진두지휘한다. 대 편성 교향곡의 지휘자와 닮았다. 초반에는 엉킨 실타래를 푸는 듯 초조하게 흘러갔다. 대부분 엄마가 자는 사이에 이루어졌다. 나는 최선을 다해서 앞으로의 나를 생성한다. 사실 이 점은 생이 마감 될 때 까지 이루어져야 할 인간의 덕목이다. 꼭 육체의 성장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어느 시기가 오면 성장을 멈춰버린다. 성장에는 한계가 없다는 걸 모른다. 하지만 소멸해 가는 육체를 하루하루 건사하며 사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여러모로 상실과 허무에 부딪히기 마련이니까. 그럼에도 잊지 말아야 한다. 존재의 성장은 끝이 없다는 것과, 멈추지 않는다는 것을. 삶의 의미가 종국에는 무용한 일이 되어버릴지라도 지금의 존재 가치의 의의를 잊지 않아야 한다.
이질적인 것으로부터 조화를 찾는다. 불협의 대상들을 제거하고 상생하게 하는 것, 나는 온힘을 다해 커갔다. 내가 기억을 잃어버리는 탄생의 그날까지 최선을 다해서.
다행히도 유전적이고 환경적인 요인은 양호했다. 엄마는 전생에 강원도 아낙이었을 정도로 고구마 감자, 옥수수를 좋아했고, 식이 습성이 자연 친화적이라 체내의 성질은 알칼리성이었다. 무엇을 먹는지에 따라 인간의 몸과 정신은 구성되고 정의된다고 한다. 아빠는 말했다. 결혼한 이후 매일 아침, 하루도 거르지 않고 사과를 먹는 남자가 되었다고. 평생 먹은 사과 보다 자기와 함께 먹은 사과가 더 많을 거라고, 그리고 무화과, 두리안 을 처음 먹어봤다는 것도. 달콤한 꿈속에 빠진 도회지 소년이 시골아이들에게 자랑하듯 의기양양 했다.
과일을 사랑하는 엄마는 태양의 따사로움을 품었다. 나는 달콤한 양수 속에서 즐겁게 유영했다. 달달한 것이 들어오면 함박웃음을 지었다. 나는 아빠가 그랬던 것처럼 언젠가 하와이의 따듯한 바닷물 속에서 태초의 감각을 어렴풋 기억할 것이다. 몸을 부드럽게 휘감는 행복의 소용돌이가 무척 기분이 좋았다.
물의 세계에서 가끔 딸꾹질을 하면서 공기의 세계를 위한 폐를 키워 나갔다.
내가 들어서기 얼마 전 엄마의 자궁은 깨끗이 비워진 흔적이 있었다. 초기에 태아가 유산된 모양인데 그 씨앗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박동을 멈췄다. 짐작하건데 비타민D가 부족했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지구에서 햇빛은 절대적이다. 자외선이 노화의 공공의 적이 되어 푸대접 받는 동안 기본 원소 생성의 위기를 초래했다. 자연의 부족분은 인공적인 것으로 보충 받는다. 엄마는 일광욕 대신 꼭 하루 두 방울의 비타민D 보충제를 섭취했다.
비타민 D 외에도 칼슘, 칼륨, 철분 등등 필요한 요소들이 많다. 그런데 철분제는 변비를 유발한다. 엄마는 변비로 인해서 얼마간 치질 증세로 고생했다. 불편한 자세로 좌욕을 한동안 했다. 많이 미안했다. 엄마의 치질 덕분에 아빠는 매일 아침 프룬 주스를 꼬박꼬박 챙겼다. 다행히도 엄마의 입덧은 심하진 않았다.
지금은 별다른 문제는 없지만 다소 인공적인 물질이 훼방을 놓기도 한다. 이를테면 계면활성제가 샴푸를 비롯해 주방세제에 함유되었는데, 이것은 엄마 몸속에서 가장 빈번히 느낄 수 있는 화학물질이었다. 어느 날, 아빠가 엄마에게 잔소리 하는 소리를 들었다.
“자기는 너무 케미컬 친화적이야. 양호가 싫어한다고, 썬 크림을 그렇게 쳐 바르면 어떻게. 몸에 뭐 바르는 것 좀 줄일 수 없어? 그리고 울 샴푸 같은 것도 적정량이 있는 건데 그렇게 막 부으면 어떻게. 그런 것이 다 우리 몸속에 쌓이는 거야. 옥시 가습기 사건 몰라. 옥시 피해자들 생각만 해도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야. 우리는 절대 잊으면 안 돼. 우리 스스로가 지켜야 한다고. 으이구.. 내 말은 왜 이리 허투로 듣는지 원~”
일방적인 하소연이래도 맞는 말이긴 하다. 엄마는 볼멘소리로
“오빠가 내 얼굴 타고 배 트는거 책임 질 거야!.”
아빠는 자연과 환경에 예민한 사람이다. 빛에 대한 감각이 섬세했다. 세상의 아름다움에 자주 감탄했고, 세상의 추악함에 종종 분개했다. 언젠가 엄마와 아빠가 만나게 된 날의 느낌을 들을 수 있었다. 한여름의 희뿌연 더위 중에 모처럼 맑은 오후가 시작되었고 야외 펍 의 노오란 나트륨 등 아래에서 살랑이는 저녁 바람을 만끽하며 맥주를 마셨다고, 7월을 앞둔 오후의 뜨거운 열기는 마법으로 작용했던 모양이다. 나는 그 느낌들을 알 수 있었다. 무언가 이루어지는 순간들. 자연스러움은 이럴 때 계곡에 흐르는 물처럼 흐른다. 나는 그 위에 떨어진 하나의 이파리의 마음을 이해했다. 꽃가루를 머금은 바람은 둘 사이를 감쌌다. 그들은 서로의 빛을 온 눈으로 받아들이고 기꺼이 서로 비췄다.
간혹 엄마가 밤에 TV와 실내등을 켜놓고 자면 나또한 불편하다. 한번은 아빠가 그런 이유 때문에 불같이 화를 냈다. 한 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엄마의 오래된 습관인 듯 했다. 엄마는 조금은 미안해하는 것 같았다.
“자기가 청소년기에 불 만 잘 끄고 잤어도 키가 5센티미터 이상은 더 컸을 텐데.”
“그럼 오빠 안 만났을 걸!.”
“켁. 그런가. 그래도 아쉽네. 아무튼 우리의 숙면을 위해 조심해 줘. 나는 밤중의 인공조명이 너무 싫어. 자는 동안 저 LED 빛이 마치 계엄군이 휘두르는 무자비한 곤봉 같은 느낌이야. 지금 몸이 만신창이라고.”
아빠는 자신이 왜 빛에 민감한지를 설명했지만 그 주장은 터무니없어 보였다. 피부가 하얀 사람들이 빛에 민감하다는 논리로 서양인들의 주거 문화는 간접 조명인, 스탠드를 선호하고 밝기가 낮은 환경으로 꾸민다는 것이다. 아빠의 유전자는 북방계 아시아인의 하이얀 피부였다. 엄마의 바람 중에 하나는 하얀 피부를 선망한다. 나는 그 열망을 읽을 수 있었다. 엄마는 조금만 햇빛에 노출 되도 얼굴이 까매진다고 극도로 경계한다. 노력은 해 보겠지만 과연 나의 피부 톤은 어떻게 될 것인지 장담할 수 없다.
나는 남성을 선택했다. 내 존재 자체는 성별은 없지만 성향을 추구해야 하고 육체의 틀에 귀속되어야 한다. 요즘에는 인공수정을 통해서 성별을 선택하기도 하던데 사실 이것은 기술의 문제는 아니다. 그렇게라도 하는 인간의 의지에 영혼이 순응하는 것 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남성을 선택한 이유는 아빠 정자 속에 심어져 있는 강한 의지를 읽었기 때문이다. 생식 기능이 탁월한 남아가 되는 것. 인구절벽의 시대에 어떤 환경적 재앙에도 뛰어난 자연 번식능력을 갖추는 것이 표면적 이유이겠지만, 아마도 아빠는 흑인들의 생식기를 부러워 한 모양이다. 카사노바가 되지 못했던 욕망과 함께. 다행히도 나를 갖기 위해 한동안 달리기와 수영을 열심히 했고, 인스탄트 음식은 멀리했던 걸 알 수 있었다. 정자를 신선하게 생성하기 위해 그 좋아하던 사우나와 열탕을 배제하고 냉탕에서의 명상으로 심기일전했다고 한다. 16주 차 에 의사가 초음파로 비추었을 때 나는 가랑이를 쩍 벌리고 있었다. “고추다. 고추.” 요즘은 딸을 더 선호한다고 하던데, 내가 아들 이란 사실이 알려지면 어쩌나 싶었다. 다행히도 아빠는 그 동안의 조마조마함을 벗어나 모처럼 소리 내어 웃었다. 한 옥타브 상기된 목소리로 조부모가 될 분들에게 전화를 했다. “장모님 고춥니다. 고추. 아들이에요.” 그에 대한 반응은 기쁨으로 울컥했다. 그렇게 좋아할 수가. 딸 둘을 낳은 외할머니는 여섯 자매의 둘째였다.
내가 잉태되기 전 외할머니는 길몽을 꾸었다. 이른 아침, 드넓은 대지에 어린 싹이 가지런하고 반듯하게 자란 광경을 경이롭게 묘사했다. 생명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읽을 수 있었다. 우리는 모두 하나의 빛 이었다. 인간의 신체 중에 빛을 반사하는 부위는 눈이다. 눈빛을 통해 서로의 영혼의 통로를 확인한다. 하늘의 별처럼 반짝이는 순간 존재는 드러낸다. 그렇게 우리는 본다. 사랑을 한다. 사람들은 좋은 꿈을 꾸면 태몽이라고 한다. 할머니의 눈에 비친 희망은 나였다. 엄마는 하얀 호랑이가 나오는 꿈과 빨간 자두 꿈을 꾸었다. 엄마는 종종 꿈을 꾸고 나서 복권을 샀다. 아빠가 물었다.
“무슨 꿈인데?”
“안 돼, 말하면 안 돼.” 결과가 꽝으로 나오고서 엄마는 “아 씨! 황금 똥 꿈 꿨는데.”
“똥색이 황금색이지 그냥 똥 꿈 꾼 걸 가지고 원, 로또 하지 마, 하지 마, 돈 아까워. 꿈에서 번호 본 거 아니면.”
아빠는 예지몽을 꾸는 편 이었다. 불운에 대한 징후들이 꿈에서 현현됐다. 이빨이 와장창 깨지는 꿈을 꿨을 땐 첫 번째 임신이 유산 되었고 할아버지의 무릎이 부러졌다.
나 또한 꿈을 꾼다. 이것은 다시 시작하기 위한(깨끗이 잊기 위한) 서사의 소거 작업이다.
매년 봄이 오면 언제나 꽃은 핀다. 미세 먼지가 나날이 서울의 봄을 뒤덮어 버려도 생명의 탄생과 죽음은 끊임없이 반복된다. 내가 몸집을 키워나가고 있을 한창 무렵, 초미세 먼지는 나도 느낄 수 있었다. 먼지의 맛은 걸레 빤 물 맛 같았다. 엄마의 혈관은 수축했고 혈행은 나뻐졌다. 이물질로 인한 염증 발생의 위험도 높았다. 이런 위기는 겪어보질 못했다. 나는 이내 환경의 변화에 익숙해져야만 했다.
아빠의 유전자 속에는 바람에 대한 열망이 강했다. 오랫동안 자전거를 타며 바람을 맞은 펑퍼짐한 얼굴은 갸름한 유전자를 형성하게 했다. 청정한 숲에서 맑은 공기를 만끽한 흔적이 많았다. 나는 그것을 밑바탕 삼아 오염에 대한 대응력을 강화 했다. 하지만 유전적 요인 외에 지금 벌어지는 미세 먼지는 고스란히 우리를 침범했다. 열악한 대기 환경에 대처하는 신체가 요구되었다. 일단 속눈썹이 강해졌고, 미세 먼지를 거르기 위해 콧 털과 피부의 털을 섬세하게 만들었다. 폐부의 모세 세포들은 가장 중요한 현안이었다. 내가 생성할 신체는 더욱 오밀조밀 복잡해져야만 했다. 나는 이 위협을 극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내가 맞이할 오염된 세상은 더 많은 신체적 대응 노력을 필요로 했다. 신인류의 탄생일 정도로.
엄마는 자주 응원을 전해 줬다.
“읏쌰, 읏쌰, 양호야. 양호하렴.”
존 레논의 <이매진>이 흘러나온다. 바흐의 음악도 들었고 아빠가 좋아하는 비틀즈의 노래들도 많이 들었지만 가장 좋은 건 엄마가 흥얼거리는 이름 모를 허밍이다. 5월의 바람에 실려 자유롭게 울리는 음률은 소곤이 속삭인다. 자유롭고 평화롭게 쑥쑥 크거라 우리 아가~ 의 염원이 담긴 의미라 여겨진다. 아빠는 뉴스를 보며 <임을 위한 행진곡>을 읊조렸다. 새 대통령과 다함께 부르는 장면이 참 감동적이라고 했다. 그리고 어린 시절, 군사독재정권치하에서의 소회를 내비췄다. 그 80년 5월의 자료 영상을 처음 봤을 때, 너무나 무서워 잠을 못 잤다고 했다.
“80년대에 TV에서 틀어줬던 외계인의 지구 침공을 다룬 V라는 미국 드라마 보다 더 모골이 송연해지는 느낌이었어. 인간의 살갗을 벗기면 파충류가 보이고 사람의 탈을 쓴 외계인들이 생쥐를 통째로 입에 넣어 먹는 장면은 정말 무서웠어. 그래도 5월의 광주는 생각만 해도 무섭고 치가 떨려.”
내가 새 대통령이 당선된 다음에 태어나게 되서 다행이라고 했다. 적폐청산의 물꼬가 비로소 트였다고 새 희망으로 엄마 배를 통통통 두드렸다. 엄마는 배튼다고 쓰담 쓰담 하라고 했다.
1987년 구로구청 부정선거 데모를 자랐던 동네에서 겪은 일화도 들려주었다. 매캐한 최루탄 가스 냄새에도 꼬맹이의 눈에는 대학생형아의 손에 쥔 불타오르는 화염병이 휘둘러져 포물선으로 날아가 아스팔트 위에 불꽃을 터트리는 장면이 너무 멋있었다고 했다.
“클레이튼 커쇼의 폭포수 커브 보다 훨씬 더 멋졌어. 돌멩이는 최동원의 직구 저리가라였지.”
뭣도 몰랐지만 당시 거리에 모인 사람들의 원성과 울분이 자기한테도 전달됐다고 했다.
“1987년이 벌써 30년 전이야. 그때 기억이 생생한데.”
내가 태어나 어느 정도 크면 아빠는 분명 내게 캐치볼을 시도할게 명백하다.
나는 하루가 다르게 커갔다. 금세 엄마 뱃속이 꽉 찼고 다행히도 내가 무거워질수록 머리는 점점 아래쪽으로 향했다. 엄마는 부지런히 산모교실을 다녔는데, 초산의 불안을 잠재우고 정보를 얻기 위해서였지만, 부차적으로는 많은 선물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엄마는 나를 복덩이라고 했다.
출산의 위험 요인들은 나도 긴장하게 만들었다. 엄마의 좁은 골반 뼈 사이를 어떻게 통과하느냔 말이다. 때가 되면 자연적인 신체의 반응일지라도 내 몸집이 커가는 속도가 무서웠다. 머리가 딱딱하지 않아서 망정이지 두뇌의 성장을 억제해야 할 뻔 했다. 엄마의 비교적 작은 골반을 탓 할 순 없다. 때가 되면 나는 필사적으로 탈출을 감행해야 한다. 지금껏 나의 생명줄인 탯줄이 오히려 나를 위험에 빠트릴 수 도 있다. 본능적인 감각으로 머리가 나온 후에 어깨를 횡으로 틀어 잘 빠져나와야 한다. 만에 하나 이런 템포에 엇박자가 나면 고통과 위험은 비례한다. 수없이 애기들을 받아 본 베테랑 간호사 선생님은 출산 시, 각종 위험 사례들을 담담히 전했다. 나는 가만히 귀 담아 들었다. 결국 잊혀 지더라도 그 날의 최선을 위해 몸에 각인시켰다. 엄마의 고통을 최소한으로 경감시키기 위해 나는 신속하고 당당하게 열고 나갈 것이다.
올해의 신생아 출생 수는 사상 최저가 될 거라 한다. 작년의 최저 40만 명대의 기록을 갈아치워 30만대로 떨어진단다. 뉴스에선 이런 수치의 심각성을 연일 보도 한다. 인구절벽시대, 생산인구 저하로 인한 경제위기, 미래의 위기는 상상하지 못한 미래다. 무슨 말이냐면 현실의 불안 요인들은 미래를 상상하지 못한 결과다. 축소를 상상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팽창만이 답이 아니다.
현실적인 육아 비용 때문에 아이를 갖지 않는 가정도 많다고 한다. 불행히도 생명의 주체가 돈에 귀속되었다. 생산과 소비의 잣대로 인간을 보는 건 참 냉혹하다. 대체 가능한 인간 사회의 탄생의 축복은 꼴랑 경제 지표의 그래프로 보여 진다. 나 또한 숫자의 일부가 될 것이고 불안한 미래의 희망을 짊어지고 태어날 것이다.
유제품 회사가 주최하는 산모교실에서 만난 태아들은 한 결 같이 자부심이 대단했다. 어쨌거나 자신의 부모에게나 국가와 민족의 구성원으로써 우리는 더욱 더 소중한 존재가 되었다는 점이 그러했다.
같은 테이블에 앉은 엄마들끼리 서로 태명을 여쭈었다. 축복이 튼튼이 같은 매우 흔하고 무난한 태명도 있는 반면 루샤, 고봉이 같은 유독 희한한 이름도 있었다. 엄마들뿐만 아니라 태아들도 서로의 태명이 궁금하기는 마찬가지, 우리는 귀를 쫑긋 세워 그 이름의 해설에 집중했다.
루샤 엄마는 루이비통, 샤넬 같은 명품이 되라 란 의미였고, 아마도 고급스런 인간이 되라는 말이겠지. 고봉이 엄마는 아기가 커서 고액 연봉자가 되라는 염원을 담아 지었다고 한다.
아마도 ‘헐’은 이럴 때 쓰는 말이 적확했다. 엄마와 나는 순간 일치했다. 아빠가 양호란 이름을 지은 것이 얼마가 다행인가. 나의 태명이 무척이나 마음에 드는 순간이었다. 정작 고봉이는 아무 생각이 없어 보였지만, 왠지 고봉이가 학교에 들어가면 미래의 꿈을 부모 보다 한 술 더 떠 ‘임대사업자’ 라고 말 할 것 같은 상상이 되었다. 우리 태아들은 서로 소통할 수 있는 창이 있었다. 돌고래가 초음파로 대화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축복이가 고봉이 에게 말했다.
“너 이름 정말 대박이다.”
옆에 있던 로로또또가 거들었다. “그러게 내 이름 로또 보다 훨씬 쎈 데.”
고봉이가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어차피 태어나면 다 잊혀 질 이름인데 뭘. 부모의 바램 인데 뭘 어쩌겠어.”
반면 루샤는 뜬금없이 자기 의사를 말했다.
“나는 그렇게 안 하는 것을 선호합니다.”
어디선가 툭 튀어나온 루샤의 소극적 저항의 말은 좀 이상했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울림이 컸다. 심지어 고봉이를 포함한 우리 모두의 의중을 반영한 말 이라 여겨졌다. 약간의 깨소금 같은 깨달음이 뇌신경을 자극했다. 우리는 무엇이 되지 않아도 생명 그 자체로 축복을 받을 자격이 있다. 그리고 태아 교육으로 무엇을 강제하거나 주입 할 필요 없다. 무슨 선언문 같은, 암묵적 동의가 잠시 정적과 함께 흘렀다.
부모가 이 말을 들을 수 있다면 뭔가 달라졌을까. 부모들은 여전히 영어 동화책을 밤마다 큰 소리로 읽어 준다. 우린 태어나기도 전부터 교육을 받아야 한다. 태교여행이라고 장거리 비행을 감행한다. 우리는 태교란 이름하에 자행되는 소란스러움을 반대한다. 너무 빈번한 초음파 검사도, 항생제 뒤범벅인 저질 육류의 섭취도, 방부제 덩어리 빵도, 약간의 카페인의 각성 효과도.. 우리는 그렇게 안 하는 것을 선호한다. 동시에 엄마의 배를 툭툭 차는 것으로 저항은 이뤄졌다. 엄마들은 제각각 움찔했다. 엄마는 오줌을 찔끔 지렸다. 아마도 루샤는 바틀비가 누구였는지 알고 있었을 것이다. 혹은 루샤가 오래전 작가 허먼 멜빌의 현현 이었던가.
생각났다. 내가 그 말을 쓰고 싶었던 순간이. 아빠는 운전할 때 자주 화를 냈다. 서울의 도로에는 화 의 에너지가 넘실대고 있는데 마음을 단단히 묶어두지 않으면 화가 자기를 침범한다는 거다. 한 번 침범당한 화 는 차안을 스트레스의 도가니로 만들었다. 아빠가 경계에서 자주 뚫렸기 때문에 엄마와 나는 화의 기운에 수시로 노출됐다. 나는 외쳤지만 돌아온 것은 로큰롤 음악의 소란스러움 이었다. 아빠는 좋은 음악을 들려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음악이래도 음악은 개인의 취향이 우선시 된다고 본다. 하루 종일 힙합을 틀어대는 통에 오리 궁뎅이 씰룩대듯 심장이 바운스 치는 것 보다야 향수 어린 비틀즈가 나았지만 어쨌든 나는 소란이 빗겨나가길 바랬다.
아빠가 해주는 음악 이야기는 재밌었다. 대부분 중독의 밑바닥까지 내려간 폐인이 스스로 극복, 반등하여 성공한 케이스를 좋아했다. 그런 영혼을 담은 음악은 좀 더 하늘과 닿아 있다고 할까. 진정한 뮤지션들은 별의 고독과 닮았다. 흩뿌려진 빛의 파동을 고유한 음의 진동으로 전환한다. 밀고 당기고 높이고 줄이는 모든 과정이 하늘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길을 통해서 쏟아진다. 아빠는 기타를 치며 하늘에 노크 했다. 멜로디가 흐르지만 잡을 수 없었다. 음악의 아름다움은 흘러가는 강물을 보는 것과 같다고 했다. 뭔가가 흐르는데 잡을 수 없는 안타까움이 가득한 그런 상태가 음악을 느끼기에 가장 좋다고 했다. 소도 음악을 들으면 우유를 더 많이 생산한다고 하는데, 나도 음악을 통해 내 안의 성장의 흐름을 더 활발하게 했다. 막힘없는 흐름이 성장, 혹은 생명의 유지에 가장 중요한 점이다. 모든 건 흘러야 비로써 살아있음이 가능하다.
그런 점 에서 아빠의 고충은 이해 할 만 하다. 엄마의 말마따나 주기적으로 강아지가 되는 시기가 있다. 아빠의 정액이 꽉 차면 슬슬 끙끙 대며 안절부절 한다. 새벽녘, 무의식중에 하체에 너무 힘이 들어가 종종 다리에 쥐가 나 애를 먹기도 한다. 첫 번 째 임신이 실패 후, 임신 초기에 부부관계가 위험하다는 인식이 강해서 아빠는 초월적인 인내심을 발휘했다. 몽정도 마다않고 참고 또 참았다. 그러다 안정기로 접어든 어느 날, 아빠가 침공했다. 물론 엄마의 허락을 받아, 나를 배려해 조심스레 파고들었다. 조용히 말을 건냈다.
“양호야 미안해. 잠시 눈 감아줘.”
나는 막 잠에서 깬 터라 어리둥절했다. 나찌 군을 피해 숨은 지하실에서 숨죽이며 눈동자도 굴리지 못하는 유대인의 심정으로 잠자코 있었다. 우리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서로서로서로 조심했다. 기어코 물줄기가 터졌을 땐 욕망의 해방에 적잖이 안도감이 들며 희열이 넘쳤다. 아빠는 얼마간 심신의 평화가 유지 될 것이다. 나는 당연히 이해했다. 아빠는 나를 갖기 전 보릿고개에 꾸어다 둔 쌀 한 바가지 갚듯이 꼬박꼬박 비웠으니까. 부부관계의 친밀성이 나로 인해 조금은 방해가 된듯하여 어쩔 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쑥떡과 백설기 사이에 낀 앙금 같은 존재가 나였다. 엄마는 종종 백설기 같이 폭신한 아빠의 뱃짝을 어루만졌다. 그리곤 나에게 주문을 걸었다.
“피부는 뽀얗게 아빠 닮아야 한다. 오똑한 코도 아빠 닮으면 좋고, 긴 팔 다리는 엄마 닮고, 건강하게 자라다오.”
나는 이제 거의 3 킬로그램에 육박했다. 키는 50센티미터 정도 됐을까. 조금 이르지만 지금 태어 난다해도 무방하다. 너무 커서 출산이 힘들어지면 안 된다. 엄마가 단백질을 더 섭취하고 당분의 유입을 조절 할 필요가 있다. 때마침 제철 과일인 수박, 참외, 체리가 많이 섭취 되었다. 태아 때부터 식습관의 조절과 관리가 필요하다. 이제는 많이 먹어서 생기는 질병이 태반이다. 맵지 않은 음식의 섭취도 나에겐 좋았다. 아빠가 유독 매운 걸 못 먹는데 아빠는 늘 왜 한국 사람은 매운 걸 이렇게나 많이 먹고 좋아하나? 의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아빠의 추측은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전란과 수탈로 춥고 배고픈 민중이 적은 음식으로 열을 좀 더 내기 위한 방편으로 고춧가루의 섭취가 늘었고, 요즘에 와서는 스트레스해소 차원의 이열치열과 더불어, 먹고 죽자. 라는 대식의 습성이 한국인의 기본 성정 까지도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했다. 무엇을 먹는 것이 균형 잡힌 신체와 자아의 형성에 있어 중요하다는 아빠의 생각은 그럴듯해 보였다. 자아 존중의 첫 발은 좋은 음식을 섭취하는 것에 있었다. 나는 감사한 마음이다. 좋은 먹거리에 대해 신경을 써 준 두 분에게 건강함으로 보답하고 싶다.
바다 소리를 들었고 산속의 새소리를 들었다. 봄 가뭄으로 인해 빗소리 대신 차안에서 오아시스의 노래를 실컷 들었다. 진공의 세상에서 물의 세계로 이제 다시 공기의 세계로의 전환이 목전이다. 차창으로 내리쬐어 동그란 엄마 배에 스며든 햇빛을 느꼈다. 조급히 웅성 되는 바퀴 소리와 바람의 파형은 경쾌했다. 이제 유월의 아침이다. 나는 기지개를 켜며 아침의 문을 열 준비가 됐다. 내 머릿속에는 북소리가 커졌다. 두둥. 두둥. 골반에 끼인 머리가 죄어왔다. 이제 곧 하얀 빛과 함께 내 기억은 한동안 사라진다.
어느 날, 흑백의 세상이 점차 총천연색으로 보일 때, 나는 잠시 내 존재를 명징하게 인지할 것이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은 어디인가? 두리번거린다. 작은 육체에 갇힌 나는 발버둥 치다가 이내 곧 잠에 빠져들 것이다. 그리곤 다시 이 생이 다할 때까지 내가 무엇인지 탐험을 계속 할 것이다.
나는 무수한 인생을 살아왔고, 고스란히 잊혀 지기를 반복했다. 별빛을 영혼에 가득 담아 이제 다시 시작이다.
엄마 뱃속의 나의 이름은 양호였다.
태어난 후에 나의 이름이 무엇일까. 분명 평범하진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