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수덕사 방문은 911 테러의 기억과 함께 한다. 대학생때 다른 과의 어느 교수님으로부터 사진 촬영 요청을 받았었다. 수덕사에서 오랜 문서를 촬영해 달라고. 나는 약속의 안전을 위해 하루 전날 천안에 자취하는 친구집에서 하룻밤 자고 수덕사로 가기로 했다. 친구 집에 도착해 씻고나서 TV 채널을 돌려보다가 뉴스 속보가 흘러나왔다. 너무나 충격적인 영상은 실시간으로 벌어지고 있었다. 영화보다 더한 참혹한 현실에 그날 밤 눈이 쉽게 감겨지지 않았다. 뒤숭숭한 기분으로 잠을 잤지만 다음날 아침은 의외로 상쾌했다. 수덕사로 가는 길은 너무나 고요했다. 가을 문턱의 공기가 닭살을 돋구웠다. 평일의 수덕사는 너무나 평온했다. 처음 와 봤지만 단숨에 마음에 드는 장소라 느꼈다.
지금은 그곳이 정확히 어딘지 모르겠다. 교수님 일행을 만나 쫒아 들어간 곳은 비밀의 집처럼 대나무가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한옥집이었다. 작은 마당과 집 한채는 큰 절의 부속건물이라기 보단 독립적인 밀실같은 곳 이었다. 깊은 산속이 아니었는데도 세상과는 유리된 고요한 적막감이 한층 배가되었다. 단번에 번뇌가 사라지고 평화로운 마음이 깃들었다. 그곳은 아마도 비구니 스님들이 기거하는 곳이었다. 노스님을 접견하고 마침 점심 공양때라 밥상이 들어왔다.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의 식사라 다소 긴장했지만 밥이 너무 맛있어서 침묵속에서도 너무 맛있어요를 연발했다. 밥도 밥이지만 너무 아름다운 한옥집 이었다. 대나무벽 사이로 햇빛이 격자무늬로 쏫아졌다. 빛바랜 나무 복도가 촘촘히 자신의 결을 드러냈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서의 식사는 잊혀지지 않는다. 내 인생 최고의 식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상을 내물리면서 본 부엌간의 모습은 전통 그대로의 아궁이와 솥에서 지어진 밥 이었다.
식사에 비해 내가 맡은 임무는 다소 싱거운 것 이었다. 노스님이 소장하고 있는 오래된 편지와 글씨들을 촬영하는 것이었다. 그 분들이 누구인지 전혀 모른다. 같이 간 교수님 외 몇 분들은 특정 인물을 연구하려는 목적인 듯 했다. 일을 마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이곳의 정취를 음미했다. 어제 밤에 본 충격적인 영상이 뇌리에 맴돌았다. 너무나 평화로운 수덕사에서의 한나절은 특별했다. 지금 여기 나는 무엇인가. 인간의 고통에 대한 나의 무력감은 차곡차곡 쌓여진 석탑이었다. 내 마음속의 석탑들은 그 후로도 여럿이지만 이 날 수덕사에서의 적요는 생생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긴 버스 여행의 여정은 힘들지 않았다. 나는 선명하게 깨어있는 느낌을 받았다.
수덕사에서의 짧은 추억이 아쉬웠는지 몇년 후, 다시 한번 이곳을 찾았다. 지금 생각하면 다 추억이지만, 프로그램형 템플 스테이에 참석 했을때 새벽 세시 반의 예불 참석과 새벽녁의 108배는 너무 힘들었다. 하루만에 관둘까도 생각해 봤지만 장마철이어서 대형 절의 관광객 맞이 보다는 산 등성이를 휘감은 구름과 고즈넉한 빗소리의 운치가 너무 좋았다. 몇일간의 단체생활이 녹록치 않았지만 산의 정취가 모든걸 무마했다. 머리맡에 폭포가 콸콸 쏟아지는 소리를 들으며 잠을 자고 1300년대에 지어진 대웅전의 촛불이 밝히는 내부 색감은 환상적이었다. 분별없이 스님들과 같이 예불을 드리는 체험도 산사 체험의 절정이었다.
사소한 듯 일상의 모든 체험 속에서 배울 수 있는 여지는 정말 많다. 20대 중후반 그때 나는 너무 자기에 집중해 있었다. 침잠해 있던 내게 불쑥 꼬맹이 아가씨가 너무나도 티없이 다가왔다. 내게서 무엇을 읽은 것인가. 나는 단기 출가자답게 진중히 최소한의 말만을 하며 모든 프로그램에 참석했다. 참석자 중에 가장 어린 그 아가씨는 20대 초반이라는 나이에 비해 너무 어린아이 같았다. 천진난만은 그럴때 쓰는 말 일 것이다. 나는 누구와도 허물없이 다가서는 꼬맹이가 신기하면서도 내심 부러웠다. 서슴없이 내 등과 어깨에 기대고 내 공책에 메시지를 끄적이던 아이는 무례함은 아니었지만 적잖이 당혹감을 주었다. 그것을 포용할 여유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내 마음은 굳게 닫혀 있었다. 분명 그 순수한 행동에는 인간 본연의 선한 의지가 드러나 있었다. 아픈 사람에게 당연히 손을 내미는 아름다움을 당시에는 몰랐다. 타인이 내미는 손을 잡을 용기가 없던 나. 십여년이 지난 지금 나는 어떤 존재로 성장을 했는지 자문을 해 본다. 지금 추억을 곱씹으며 살아있는 부처는 그 꼬맹이가 아니었을까. 라고 생각해 본다.
한 장소에서의 추억은 계속 진행되었다. 지난 주말 봄이 만개한 수덕사에 부모님과 옆지기와 함께 하룻밤을 묵었다. 오랜만에 재방문한 수덕사는 대형 절의 위용을 더욱 뽐내었다. 수덕여관이 수덕사에서 관리하여 단장했고 좀 더 많은 건물들이 들어섰다. 우리는 새로 지어진 완월당이라는 한옥에서 지냈다. 저녁에 치는 북 소리는 예전에 비해 웅장함이 사라졌지만 그 울림은 이 순간을 집중하게 했다. 비록 새벽 예불의 아우라를 다시 느껴보지 못했지만 절에서의 하룻밤은 평온한 마음을 가져왔다.
6시에 아침을 먹고 바로 뒷산인 덕숭산 산행에 나섰다. 근대 불교의 대 선사인 경허 와 만공 스님의 유적이 서려있는 정혜사, 그리고 석불 과 만공탑을 운해와 함께 감상했다. 위대한 선지식들이 걷던 이 길을 걸으면서 나는 무상하였다.
절에서 점심을 먹고 채 두시간이 안 걸려 서울에 들어섰다. 자극적이지 않은 절 밥이 나는 무척이나 맞지만 자극적인 음식에 길들여진 아버지의 입맛에는 소식을 불러왔다. 부모님과의 하나의 추억이 사진으로 아로 새겨졌다. 이 봄 날이 유한하다는 것이 더 아름답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