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trave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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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ing to Texas 1

텍사스의 드넓고 탁 틔인 들판을  처음 보았을 땐 황량함 그 자체였다. 십여년 전, 나는 텍사스 주, 북부 (프라이팬 손잡이 처럼 튀어나온 모양이래서 팬 핸들이라고 불린다) 를 자동차로 지나고 있었다. 이곳을 지나는 동안에 본 것이라곤 광활한 황토색 땅 위에 펼쳐진 거대한 소 사육장. (푸른초원의 목장과는 사뭇 다른) 과 수많은 석유 시추기가 끄덕대는 풍경이었다. . 셀 수 없는 쇳덩이 탑들이 군집을 이뤄 펼쳐졌다. 이것들은 인디언 보호구역의 처참한 생활상과 함께 미국의 맨 얼굴 이자 이면의 진실이었다. 탐욕적인 속내의 풍경이리라. 거대함, 막대함, 비인간적. 지구의 풍경이라기 보단 외계의 모습같은 기이함에 몸서리 쳐졌다. 자국내에서의 석유 생산량도 내가 본 풍경처럼 많을 텐데 중동에 개입하여 석유 이권에 개입하는 꼴 사나움. 쯧쯧 있는 놈이 더 한다는 씁쓸함이 입맛을 적셨다. 가축이 아닌 사료처럼 생산되는 소들의 거대한 수용소 역시. 몇일 내내 퀭한 눈으로 시속 100킬로미터로 멀리서나마 스스슥 지나쳤지만 그 광경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훗날 뉴스에서 미국산 소의 광우병 우려에 대한 자료화면속의 영상과 비슷했다.

다시 방문한 미국에서, 텍사스주에 3개월을 체류했다. 십여년 전 내가 보았던 텍사스 와는 정 반대의 곳 이었다.

희뿌연 인천공항을 뒤로하고 쾌청한 달라스 포트워스 공항에 13시간만에 착륙했다. 내가 절실하게 느낀건 예전같지 않은 비행기 타기의 힘듬이었다. 이코노미클래스 증후군이 뭔지 알 것 같았다. 하늘 위에 갇혀있는 시간동안 새 일기장에 글을 썼다. 일기를 쓰는 건 좋은 일이지만 그것을 다시 들쳐보는 일은 거의 없다. 일기 쓰기의 핵심은 그 순간, 진솔한 자기 자신과의 대면의 시간 이다. 얼마간 새로운 환경으로의 이동은 설레임과 긴장을 동반한다. 그 감흥을 여과없이 쓸 수 밖에 없었다. 글을 얼마나 잘 쓰는게 중요한게 아니다. 일신의 변화에 직면한 자아에 어떤 다짐으로 깨어있을지 확인하는 순간이다. 내가 글을 끄적이며 뒤척일 때, 본 왼쪽 자리의 승객은 정말 부러웠다. 처음부터 내릴때까지 식음을 전폐하고 잤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하는 존경심 마저 든다. 그에 비하면 나는 여행의 하수 임에 틀림없다.

화이트 와인 플리즈 가 아닌 와이트 와인 플리즈를 유의 하며 먹고 마시며 자고 쓰고 그러다 보니 어느새..

파란 하늘과 쨍한 태양이 수척한 승객들을 맞이했다. 내 오른쪽 통로 자리에 앉으신 분과는 비행기를 내리면서 말을 나누게 되었다. 13시간 하늘의 감옥에서 비로서 벗어났다는 기쁨의 발로가 드디어 말문을 트게 만들었다. 라스베가스에 사는 딸의 산전조리를 위해 이 먼길을 온 아주머니와는 입국심사를 기다리며 유예했던 대화를 나누었다. 계속 뭔가를 쓰는 내가 인상깊었단다. 비자면제 프로그램(ESTA) 때문에 입국심사가 기계식으로 비교적 단촐해졌다. 세관원인듯한 흑인 직원이 내 가방을 챙겨주면서 자기는 김치를 좋아한다고 어설픈 한국말로 건넸다. 얼마 후 나는 알아차렸다. 기내에서 제공했던 김치를 안 먹고, 안 버리고 점퍼 주머니에 넣어 두었었는데, 진공 포장을 뚫고 냄새가 세워나와 옷에 배었다. 우리가 김치는 맛있게 먹지만 스며든 김치 냄새는 썩 좋지 않다는걸 다시금 인지했다. 그 직원의 우회적인 표현이었을 언급에, 이후로 김치 냄새에 경각심을 가지게 되었다. 분명 카레 냄새 보다 훨씬 좋지 않았기에..

처음 미국에 왔을때의 어리둥절함이 생각난다. 시카고 오헤어 공항에서 스탑 오버를 했는데, 갖은 인종의 생경함. 하나도 못 알아듣겠는 공항 안내 멘트의 속상함. 히스패닉계 입국 심사원의 무표정한 표정 하나하나가 머리 속을 백지로 만들었다. 911 테러 이 후 미국 공항의 삼엄함은 절대 유쾌하지 않다. 그때 그때 다 달라요 라지만 공항 보안 검색대는 여행의 흥분에 찬물을 끼얹는다.그런 상념과 이런저런 절차 와중에 아주머니와 인사도 못 나누고 서로의 목적지에 따라 자연스레 흩어졌다. 공항의 속성은 원래 그런가 보다. 40분 정도의 비행이 아직 남아 있었지만 계류중인 비행기만 봐도 좀이 쑤셨다. 여긴 텍사스다. 맑은 태양과 고도비만인 사람이 태반이었다.

하늘에서 본 대지엔 곳곳에 호수가 엄청 많았다. 곧 듣게 될 얘기엔 텍사스의 거의 모든 호수는 인공호수라 했다. 그런 노력 덕분인지 서쪽의 사막화된 땅이 아니라 동 텍사스 에는 녹지가 뒤덮였다. 하늘에서 내려본 푸른 초원을 보며 아메리칸 이글의 초연함으로 빙의됐다. 내가 이땅에 머물곳은 어디인가. 드넓고 띄엄띄엄 한적한 이곳의 삶은 어떨 것인가. 텍사스 블루스가 듣고 싶어졌다. 전설이 된 블루스 맨 스티비 레이 본. 그가 헬기 추락 사고로 죽었다는게 생각났다. 서던 록의 레너드 스키너드의 명곡 ‘심플 맨’ 과 ‘프리 버드’도 생각났다. 이 또한 비행기 추락사. 영화 ‘콘에어’ 에서 비행기를 탈취한 범죄자들이 신나서 레너드 스키너드의 ‘스윗 홈 앨라바마’를 부르자 우두머리인 존 말코비치가 비행기 추락으로 죽은 사람들의 노래를 부르는걸 조롱하는 장면이 생각났다. 꽤 오래 사용된 흔적이 역력한 작은 제트 비행기안에서 그러한 음악이 생각났다. 수화물은 제대로 도착하여 과연 볼 수 있을까.

한적하고 규모가 작은 공항에 내리자 해가 늬웃해져 있었고 현지 주민인듯한 사람들은 제각각 재빠르게 흩어졌다. 텅 비어버려 적막까지 흐르는 대합실에는 나와 한국인 커플 뿐 이었다. 얼마 후 픽업하러 오신 분은 한국분 이었다. 연식이 되어보이는 혼다 오딧세이 승합차에 짐을 싣고 우리는 숙소에 들어가기전 몇몇 생필품을 사기 위해 월마트에 들렸다. 이때는 몰랐는데 이 후 여기에 오는게 그리 기쁠 수 가 없었다. 왜냐면 한적한 목장에만 있다보면 문명의 결핍에 갈증을 느끼기 때문이다. 영국출신의 유명한 사진작가인 마틴 파 는 세계 어디를 가던 그 곳의 마트를 처음으로 들려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의 핵심은 무엇을 소비하며 사는 것 일 수도 있다. 무엇보다 월마트에서의 충격은 사람들이 총알을 꽤 많이 사 간다. 마치 껌 한 통 사듯이. 간혹 주말에 저 멀리 어디선가 총소리가 울렸는데, 자기집 뒷 뜰 같은데서 총 쏘며 노는 일이 이들의 취미인 것이다.

새로운 공기를 음미하며 주변의 풍경을 담았다. 내 몸에 처음으로 각인되는 느낌은 광야의 고독감 이었다. 2003년 나는 강박적으로 이것을 위해 무작정 뉴욕을 떠났었다. 대 도시의 일상을 벗어나고픈 욕망은 무위자연의 고독을 만끽하게 했다. 무위한 일이었지만 지나고 나서 되새겨보면 정신의 정화에 도움이 됐다고 믿는다. 이 땅의 정령들이 영혼을 어루만져주는 기분이었다.

도로에는 차들만이 뜸뜸이 있을 뿐 거리를 걷는 사람은 보이질 않았다. 모든게 드문드문한 풍경이라 모든게 빼곡한 풍경에 길들여진 내겐 생소했다.

노을 빛의 여운이 가시고 베이스 목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어두웠다. 도시의 어둠에 익숙한 내게는 정말 깜깜한 풍경이 낯설었다. 그만큼 밤에 보이는 별도 환상적이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윤동주 시인이 절로 생각나지 않을 수 없다. 별을 보며 생각나는 사람이 있어 다행이었다.

나는 기독교인이 아니었지만 미국 문화의 원류를 알기 위해서는 기독교 문화속에서 살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내가 선택한 이상 당연히 열린 마음으로 이곳의 삶과 문화에 동참하고자 했다. 종교와 믿음에 대해 제 생각을 솔직히 드러내는게 여기서 받은 고마움에 누를 끼치는 일이 아닐까 고민하게 됐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나는 기독교인이 아니고 글을 쓴다는 건 내가 느낀바대로 가감없이 이야기 하는 것이 글이 가진 숙명이라 생각한다. 오히려 내부자가 아닌 외부자의 시선으로 본 기독교, 더 나아가 미국 문화의 면목을 제대로 바라 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지낼 기숙사는 썩 좋은 곳은 아니었지만 공동 생활 건물이 좋으면 얼마나 좋겠어 하는 생각이 앞섰다. 개인 책상. 독립된 공간의 부재는 목장내 작은 도서관을 이용하면서 해소 했다. 하지만 부실한 침대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덕분에 얼마간 허리가 안 좋아졌지만, 매일 조깅과 산책을 하면서 현상 유지를 했다.

다음날 아침, 장거리 비행의 피로를 간직한 채 샤워를 하고 밖에 나가 아침의 신선함을 만끽했다. 처음으로 본 이 목장의 풍경이 그림같았다. 크고 작은 호수와 드넓은 잔디 밭. 얕트막한 건물들과 시선 끝까지 이어진 하얀 펜스. 새들의 지져귐은 맑은 하늘을 타고 온종일 울린다. 풀 밭 안에는 개미들이 모래성을 곳곳에 지어놓고 왕국을 이룬다. 파란 하늘 투명한 햇살 4월의 선선한 공기. 막 개화한 나무의 잎새, 이 곳의 첫인상은 자연의 평화로움 그 자체였다.

일요일 아침 이었기 때문에 차로 10분거리에 있는 교회에 갔다. CCM 밴드가 콘서트를 방불케 하는 음향시스템으로 찬송하고 있었다. 남녀노소 거의 백인들. 사람들은 친절하고 서로에게 우호적이다. 심지어 이방인인 우리에게도 선뜻 인사를 나눈다. 모든게 생소했지만 최대한 사심없이 움직였다. 연사의 말들은 무슨 말인지 전혀 못 알아 듣는다. 몇몇 찬송가들은 멜로디가 듣기 좋았다. 이런 상황은 처음부터 마지막 주 차까지 똑같았다. 교회를 나오면서 몸집 큰 흑인 할머니가 자기가 길을 막아서 미안하다는 투의 넉살스런 말들을 했다. 간혹 마음이 모든 긴장에서 내려놓은 어느 순간. 그 틈으로 비수 같이 삶의 진면목이 다가왔다. 언어. 인종. 문화권을 넘어 그 짧은 순간 완벽하게 통했다. “괜찮아요, 아주머니 전 지금 바쁘지 않아요.” 할머니가 응답했다. “고맙구려 젊은이. 늙으면 모든게 민폐야. 민폐. 그나저나 참 친절하슈. 어디서 왔수?” “한국에서요. 죄송한데 제가 지금 가야해서요. 아주머니, 건강 잘 챙기세요.”

목장에 돌아와서 먹은 첫 식사는 라자냐 였다. 아이스 티, 구운 바게트 빵과 함께 나름 맛있게 먹었다. 처음 한달 동안은 식사 때 나오는 모든 음식을 맛있게 먹었다. 한달만에 몸이 둔해졌다는 느낌에 그 후 부터는 샐러드 위주로만 먹었다. 김치나 한국음식은 따로 먹지 않고 오로지 여기 사람들과 똑같이 먹겠다는 다짐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처음 내 결심이 맞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하지만 주변에 한국사람이 있는 이상, 한국 음식을 안 먹을순 없었다. 한국 음식을 한 번 먹으면 평소에 한국 음식에 대한 갈망이 없다가도 이 후, 더 원하게 되었다. 다만 라면은 예외였다. 월마트에서도 신라면을 팔고 있었고, 라면을 먹을 줄 아는 미국 사람은 또 되게 좋아했다. 매운걸 싫어하는 나는 짜파게티를 좀 가져갔었는데, 이건 누구나 다 좋아했다.

미국 전체가 그럴테지만 유독 텍사스의 비만 인구는 매우 높다고 한다. 여기에 사는 사람들의 말들을 종합하고 내가 본 대로의 판단은 우선 기름진 음식과 생활의 모든 면에서 자동차를 애용한다는 점이다. 여기에선 자동차가 없으면 그야말로 대 평원의 감옥에 갇힌 거나 다름없다. 자동차의 중요성은 공기와도 같은 것은 맞는데, 몇 백 미터 거리의 이동도 차를 이용하는 관습이 팽배 했다. 물론 한여름의 그늘도 없는 뜨거운 햇빛 아래에서 걷는 일은 불가능 할지라도 그 외 모든 생활에 걷는 일 보다는 타는 일에 익숙한 생활이다. 심지어 월마트에는 전기차 카트가 있어서 앉아서 쇼핑한다.

텍사스 주는 주거와 음식에 들어가는 세금이 낮다고 한다. 흘깃 보더라도 집들은 좋아보이고 음식은 풍족하다. 집 뒤에 수영장이 딸린 누가 보더라도 살고 싶어지는 2층 벽돌집이 3억대 라고 한다. 우리와 비교하면 이건 너무 하잖아. 텍사스 로드하우스란 스테이크 체인점에 여러번 갔었는데 싼데 양이 많고 기름져 맛있었다. 팁 포함 25달러면 족했다. 한번은 5명한테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쏜적이 있는데, 원하는 메뉴를 골고루 시켰는데도 15달러 정도였다. 여기에서 뿐만 아니라 베를린에서도 느낀바 이지만, 생활 물가는 한국이 높긴 높다.

텍사스는 매우 부자 주이다. 미국의 50개주 중에서도 텍사스 주의 경제규모는 캘리포니아 다음의 2위이고. 2015년 기준으로 세계경제규모는 10위 라고 한다. 세계 7위의 산유국. 텍사스 주만 따로 나와도 왠만한 나라 이상의 부유한 주다. 알래스카를 제외하고 가장 면적이 큰 주이기도 하다. 상황이 그러하니 여기 사람들은 텍사스에 대한 자부심이 상당하다. 텍사스 주 깃발의 큰 별 하나와 론 스타란 별칭이 의미하는 것은 독립을 시사한다고 본다. 역사적으로 텍사스 공화국 이었던 점을 들어 다른 주와는 다르게 어딜가나 성조기 옆에 같은 크기로 주 깃발이 자리한다. 브렉시트 이전에도 텍사스 독립에 관한 말들이 있어왔는데 텍시트에 관한 설들이 그나마 트럼프가 당선되면서 잦아 들었지 않나 싶다. 공화당을 지지하는 보수주의자들과 조지 부쉬 가문, 곳곳의 석유 시추기. 강력한 기독교 중심의 사회가 텍사스를 대표하고 있다.

텍사스 억양이 유독 특이한 점도 다른 주와는 확실히 차별화 된다. 실제로 텍사스 사투리가 어떤 것이냐를 물어 차이를 듣게 되었는데, 원래 알아듣기 힘든 현지인들의 영어에 더한 난공불락 같았다. 텍사스 말투는 조금은 우습고 촌스런 억양이 있는 것 같다. 웅얼대는 발음의 사람들이 많은데 한번은 게토레이란 말이 안 들려 어안이 벙벙했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에니스 역활인  히스 레저의 말투가 생각나는가. 이 글을 쓰기 위해 추억을 파헤쳐보니 영어 때문에 스트레스 받았던 기억이 수두룩 하다. 영어를 잘하고 왔으면 좋았겠지만 영어를 쓰는 환경에서 부딪히는 나름의 충격들이 실제적인 자극이 되어 동기가 되기도 한다. 누구나 그렇게 언어를 배우는 것이리라. 꼭 언어만이 아닌 문화적인 차이도 그렇다. 하지만 닥쳐보지 않으면 그 힘듬을 잘 모른다. 자존감의 상처에 얼마나 관용할 수 있느냐. 결국 마음의 평정. 내려놓음의 문제까지 연결된다. 영어를 잘 해야 하는, 잘 하고 싶은 욕망이 가득한 머리에서 벗어나, 그저 마음을 비우고 상대와의 교감에 집중할 때 비로소 말이 편해졌다.

같은 방을 쓰게 된 사람들과는 처음부터 서로 조심스러웠다. 지극히 미국적인, 프라이버시를 철저히 지키는 생활 이었다. 누군가의 코골이로 예민함이 극에 달았다가도 다음날 아침이면 와해 되야하는, 그렇게 서로에게 터치 안 하는 암묵적인 동의가 방의 공기를 지배했다. 어쩌면 미국인 코리에게서 느껴지는 아우라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제일 나이가 많기도 했지만 텍사스 본토박이고 전직 유명한 갱 이었다는 말을 들었다. 그의 종아리에 새긴 문신만 보더라도 아! 하게 만들었는데 왼쪽 종아리에는 WHITE 오른쪽 종아리에는 PRIDE 가 고딕체로 의기양양하게 새겨져 있었다. 차가운 인상과 독특한 말투도 다가서기 힘든 점 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선입견에 앞서는 것은 철저한 개인주의 였다. 물론 인종, 출신배경, 나이, 개인 성향에 따라 면모는 제각각이겠으나 나는 보통 미국인들의 전반적인 특징을 친절한 개인주의라 느꼈다. 반면 타국 출신들, 방글라데시. 몽골. 콜럼비아 등등의 사람들은 사소한 정이 넘쳤다. 그 사람 자체의 성품이 좋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출신국가의 영향도 어느정도 있다고 본다.

짧은 체류 기간 동안 많지 않은 표본으로 이런 생각들을 꺼내는게 코끼리 발 만 보고 모습 전체를 내 맘대로 상상하는 것 일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이 신이 아닌 이상, 세상의 전체 모습을, 삶과 진리의 정답을 말 할 수 있을까. 세상과 인간을 관찰하여 나와 우리 문화와의 차이점을 통해 서로 배우고 이해해 나가는게 여행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선입견이 없어진 자리에 편견이 자리하더라도 비교 문화를 통한 통찰은 개인과 사회의 발전에 기여한다고 본다. 직접 경험하면서 완성됨이 없을 세상의 퍼즐에 한 조각 꿰어 맞추는 노력이 중요하다. 편협한 판단과 주장. 불평 불만을 지양하고 차이를 통한 다름을 수긍하는것을 지향한다.

계속..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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