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립반윙클의 신부

영화의 포스터를 극장의 광고 가판대에서 보았을 때, 아리아리한 배우의 얼굴에 눈길이 가는것도 잠시, 이내 이와이 슌지 감독. 이 문자가 눈에 들어왔다. 러브레터.. 그리곤 사진속 여배우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니, 이 여자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충동이 강렬히 일었다. 마침 화장실에 다녀온 옆지기에게 전단포스터를 건네며 ” 이 영화 꼭 봐야겠다. 이와이 슈운지야..너무나도 간만에..”

가슴속 어딘가에 묵은 러브레터나 4월이야기의 감흥을 상기해 가며 친히 개봉날을 챙겨 감상했지만 곧, 원래는 3시간 짜리 영화였다는 사실을 알았다. 뭔가 배신당한 기분은 잘려진 1시간 분량만큼이나 마음에 공허를 가져다 주었다. 그런 사실도 모르고 영화를 볼 때, 조금은 편집 템포가 점프 컷 처럼 튀거나  비약이 심하다고 느꼈었는데 역시나 였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줬던 울림, 그러니까 순전히 개인적 내밀한 질문에 대한 답을 이 영화를 통해서 공유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난 지금에라도 이 영화에 대한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개인적 내밀한 질문은 이런 것 이었다. 사타구니에 거뭇한 것들이 무성해진 이래로 성욕과 관음욕은 뗄레야 뗄 수 없이 너무나 공고히 삶의 물레바퀴를 이루던 대학 시절, 인터넷이 가져온 축복?인 하드 디스크에  저장된 일본 야동을 보며 매번 든 생각은 이랬다. ‘ 저렇게 어리고 고운 여자들은 어떤 연유, 어떤 영혼이길래 자신의 몸뚱아리를 저리도 놀릴 수 있나.’ 흥분은 둘째치고 인간에 대한 일말의 양심인지, 이런 의문이 잠시 든 다음에야 화들짝 성난 자신을 인지하였다.

이런 생각은 여전히 유효했고 각종 음란물에 내포된 폭력성과 에로스야 말로 인간의 본능적 욕동이구나 란 사실과 함께 돈이 결탁된 이 자본주의 사회의 무서움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일본의 어마어마한 av산업은 자국내에서도 성토가 빗발친다고 하는데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단순한 성욕의 소비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고 보여진다. 돈 을 매개로한 개인의 자유의지는 인간의 권리에 대해 의문하게 된다. 카메라에 속박당한 어린 육체들. 자본에 결부된 순진한 영혼들이 어떤 계기로 그런 삶을 살며 어떻게 살아가게될지를 궁금하게 하는 지점에서 이 영화의 모티브가 시작된게 아닌가 하는 너무나 개인적인 소견을 밝힌다.

꼭 주인공이 결국 포르노 배우로 살아가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만, 극중 아무로의 존재나 마시로의 파국을 보아하니 마시로의 전철을 비슷하게 밟아나가지 않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지배했다. 결코 해피엔딩이 아닌 무거움과 무서움을 동시에 주는 영화였다. 혹자는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들에서 주인공 나나미의 성장과 행복의 여운을 감지했을지 모르나 내가 보기엔 그 반대였다. 도통 속을 알 수 없는 철면피 같은 아무로는 암울한 현대사회의 벼룩같은 존재였다. 그는 계속 나나미 옆에서 친철과 호의를 빙자해 그녀를 착취할 것이다.

초반에 현실의 문제의식과 전개과 무척 좋았는데, 중반부 저택에 파출부로 들어가서부터 몽롱한 환타지스런 카메라 앵글과 연출이 몰입을 방해했다. 약간의 90년대스런 철지난 스타일이 눈에 밟히나 전체적으로 클래식 음악을 고급지게 사용하여 영화가 기품이 있었다. 해가 저문뒤의 눅눅한 어둠의 톤이나 주인공 나나미의 미모가 아련하게 풍겨오는 묘한 영화였다. 그녀의 내면에 공감하기 힘든 부분이 있어서 더욱 곰곰히 생각해 보게 되었다.

(주인공역인 쿠로키 하루는 일전에 ‘행복한 사전’ 이란 영화에서 조연으로 출연한 것을 보며 은근 매력적인 외모라고 생각 했었는데, 이 영화에선 그때의 느낌과는 확연히 다른 동글동글하니 더욱 여성적인 외모로 바뀌었다. ‘행복한 사전’에서의 외모가 훨씬 매력적이라고 생각한다. 아 세시간 짜리 일본판 아쉽다.내 평점은 별 세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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